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17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장정환

한전충북본부 홍보실장

"이뻐? 이뻐? 아직도 이뻐?" 나이 꽉 찬 오십하고도 며칠 더 지난 아내는 얼굴을 들이대며 또 묻는다. "어휴 그래 이뻐"하고 나 또한 소리를 빽 지른다. 대학 일학년 때 만나 양은냄비 하나 젓가락 두 짝으로 소꿉장난처럼 살림을 시작할 때만해도 참 예뻤지.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국어 교과서 문장보다도 더 소박했던 그 시절. 당신이 웃을 때 볼에 패이던 볼우물하며, 24인치 야들야들하던 허리하며, 내 팔에 매달려 폴짝폴짝 걷던 걸음걸이하며, 배시시 웃던 그 미소를 어떻게 잊을까마는 이젠 차마 낯간지러워 말 못한다. 그러나 아내여, 입술 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하는 속말을 아느냐, 그래 네 머릿결속이 이제는 갈대처럼 하얗게 일렁이는구나, 지난 30년간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던 네 근심, 걱정, 염려가 네 머릿속에 하얗게 박혀버렸구나.

"오늘 맛난 것 좀 사줘" "난 당신이 끓여주는 냉이와 달래향 물씬 나는 된장찌개가 젤 좋아, 아님 미더덕하고 조갯살 듬뿍 넣어 끓인 생태찌개도 최고인데 집에서 그냥 먹지 뭘" 그놈의 세상 비즈니스가 뭐라고 전날 마신 술로 물먹은 스펀지마냥 무거운 몸을 쉬고싶어하는 내 음흉한 대답인 것을. 하지만 안다. 당신의 그 말은 가끔 화사한 꽃무늬 치마입고 살랑거리는 봄바람 맞으며 함께 걷고 싶다는 맘이겠지. 츄리닝복이나 슬리퍼 차림이라도 어깨동무하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픈 맘이란 걸. 코끝이 시큼 알싸하고 가슴께가 먹먹하군.

빠알갛게 되바라진 동백이나 장미, 칸나의 농염한 열정이 사그라진, 이제는 깽깽이풀이나, 강아지풀, 괭이풀, 버들강아지, 양지꽃, 민들레 같은 야생화나 개나리꽃인 아내, 그러나 개나리꽃이 봄을 가장 먼저 알려 주잖아? 서양에서는 골든벨이라고 불린다지 아마. 맑은 종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고 말이야. 게다가 내 눈엔 은은한 야생화가 훨씬 앙증맞고 고상하거든.

아직 초등학생 시절,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 선잠 속에 뒤척일 때 아버진 약주한잔 하시고 아침에 싸간 밴또 속에 김치 국물 버무려진 돼지불고기 몇 점 건져 오셨다. "환아 자나? 고기 한 점 먹고 자거라"하며 깨우셨다. 잠결에 꾸역꾸역 입안에 넣고 씹어 먹을 땐 어찌나 맛나던지. 아버진 물 한잔 벌컥벌컥 들이켜고 밤늦도록 어머니와 조곤조곤 두런거리셨다. 그 때 어렴풋이 들었던 해독 못할 세상 걱정들, 녹록치 않은 현실, 헛돌고 어긋나고 삐걱이는 소리들, 그 속에서 천 길 잠으로 빠져들면서도 부모님 가운데 누워 참 아늑하고 포근했던 기억. 이제 그 때의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 들어 아버질 그리워한다. 그 때의 아버지도 번민이 없었으며 열정이 없었을 것이며, 야망이 없었겠나. 이제 나를 낳고 기뻐하며 사랑해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며 아버지 어머닌 이 세상 흙이 되어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

아내여, 내가 그 옛날 기억속의 아버지처럼 연륜이 쌓여 다리에 힘 풀리니 알겠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영악해지더라도 아내에게 만큼은 눈 부라리지 말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진한 눈망울로 바라봐야 한다는 걸. "당신, 나만큼 의리 있는 친구 있어?"라고 우쭐대며 묻는 아내여, 아직 남은 머나먼 길, 오순도순 손잡고 걸어가자. 내가 오늘도 따뜻한 지붕이 되어주고 키 큰 느티나무 우듬지가 되어주겠다. 그리고 오늘 당장 텃밭에 올여름에 함께 먹을 고추나 상추씨앗을 뿌리자꾸나. "이뻐?"하고 물으면, "흠, 방긋거리는 웃음이 매력적이야". "맛난 거 먹을까?"하면 "응, 시큼 달콤한 과즙이 흐르는 사과 한 입 베어 먹자". 그렇게 차곡차곡 삶의 걸음을 밟아나가며 우리만의 밀의를 다지자. "봄이 파랗게 돋아났는데 당신도 오늘 초록빛이네. 크크 콕콕 찍어 얘기하니까 좋지? 우암산 벚꽃 벌써 폴폴 날리더라. 더 늦기 전에 산책 나갈까?" 매일 매일의 사소함이 콕콕 쌓여 한바탕 일생이라 안 하더냐?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