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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에어컨을 안 사려고요" 간결하고 단호했다. 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고 몇 분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여름에, 세계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무더운 해로 기록되었다는 이 폭염에 에어컨 없이 지내겠단다. 난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하려고 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이 친구가 열사의 사막에서 오래 있다 보니 더위를 먹었거나, 한낮에 50도를 넘어서는 도시에서 살다보니 서울의 날씨를 우습게 여기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아니면 애들을 덜 사랑하거나, 가족을 골탕 먹이려고 권위적인 횡포를 휘두르는 못된 가장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더웠다는 1994년 한 해에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이 3천명이 넘었다지만 그 때보다 더 뜨거운 올해는 30여명에 그쳤다. 그 이유가 에어컨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문명 때문에 온난화가 진행되어 더워졌지만 그 문명의 이기로 더위도 극복하는 것이다.

그 문명의 혜택을 거부한 이 친구는 지난 몇 년간 중동의 두바이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했었다. 아내와 아들 셋을 데리고 가서 살다가 작년에 귀국한 이 친구는 신입사원 시절 내 옆에서 업무를 익혔다.

나와 같이 일하면서 교회오빠로서 7년간 사귄 귀여운 서울 아가씨와 결혼하고 청주의 작은 아파트에 신방을 차렸다. 소꿉놀이 같던 신접살림에 집들이를 한다고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이기도 했다. 물론 음식은 이 친구 장모가 다 했다. 내가 안다. 나도 그랬었다. 그리고 큰 애 돌잔치 때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던 스테이크의 육즙과 바삭거리던 왕새우의 식감이 아직도 느껴진다.

벌써 20년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친구도 40대의 중늙은이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돌잔치를 하던 큰 애는 이제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고, 이 친구는 꾸준히 용맹 정진하여 아들 둘을 더 가진 욕심 많은 가장이 된 것이다.

아들놈 셋을 데리고 에어컨 없이 여름방학을 난다는 것은, 7년간 교회 오빠로 연애하면서 결혼까지 한 아내에 대한 눈곱만큼의 배려가 아니었다. 아, 아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오빠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내가 한 살 더 많다고 했으니 교회 동생인 것이다. 이제야 왜 가혹한 여름을 보내려 하는지 이유를 알겠다. 배려 없고 철딱서니 없는 고얀 친구 같으니라고.

"왜 안 사주는데·" 급기야 궁금해서 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도서관 갑니다. 하하하." 이 친구는 한참이나 껄껄대었다. 올해 같은 폭염에 집안에서 아들 셋과 함께 방학을 보낸다는 건 아내에겐 고문임에 틀림없다. 나도 아들 둘을 키웠다. 아들놈들은 얼마나 극성맞고 거칠고 엉터리들인지.

난 비로소 무릎을 쳤다. "처음에는 툴툴 거리다가 이제는 저녁때마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서로 자랑하는 애들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요. 아, 그런데 에어컨 사는 것 보다 돈은 훨씬 많이 들어요. 흐흐흐."

오래 전, 이 친구가 발령이 나서 타지로 떠나기 전에 책 선물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제목도 잊어버렸지만 이 친구가 그 책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며 읽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 때 흐뭇해하던 기분을 이 친구도 똑같이 느낄 것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눈만 뜨면 도서관으로 나들이 가는 가족, 어둡거나 힘든 밤일수록 더 많은 별이 보이듯, 이 가족은 여름이 뜨거워질수록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대화를 하고, 더 멋진 추억을 쌓게 될 것이다.

이 친구 덕에 여름이 시원해졌다. 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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