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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길 위에서 나는 작아졌다. 한치 앞의 풍경조차 가늠 못하던 나는 길에서 오랫동안 왜소하였다. 난 스스로를 납득할 때까지 걸었다. 외로움이 끝나는 곳, 그 길을 충만하게 느낄 때라야 난 생의 욕구가 솟구쳤다.

봄만 되면 난 그리움으로 벅찼다. 섬진강의 반짝이는 강물,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배꽃과 매화, 그리움이 넘쳐 주체하지 못할 때 훌쩍 길로 나섰다. 구례를 지나 하동에서 말간 재첩국에 뜨거운 밥을 말아 목구멍으로 꿀꺽 삼킬 때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복사꽃 만발한 섬진강변의 길은 봄빛마냥 아득했다. 연분홍 꽃잎마다 발육 좋은 여인의 살갗처럼 달큰한 관능의 내음을 뿜어냈고 난 아찔하였다. 섬진강 길은 살아야겠다는 삶의 생명력을 마구 충동질하는 길이었다.

여명 무렵에 달리는 동해안 7번국도, 힘차게 날아오르는 갈매기들의 날갯짓 너머로 항구의 아침이 붉게 물들었다. 감색바다로 출항하는 배들이 모두 만선으로 돌아오길 나는 바랐다. 어로를 마친 배들이 갈매기 떼의 영접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을 나는 꼭 보고 싶었다. 어구를 손질하고 집어등을 닦는 어부들의 굵은 팔뚝과 이마의 땀방울을 바라보며 난 그 노동하는 호모 파베르들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많은 길들이 있었다. 그냥 풍덩 빠지고 싶은 제주의 쪽빛 바다, 수평선의 뜨거운 불덩이를 덥석 삼킬 수 있을 것만 같던 제주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길, 산굼부리 억새길, 까마득한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신비스런 퇴적의 마이산길,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섬사람들의 소박한 인심을 만났던 군산 선유도 길, 눈부시게 출렁이던 여수와 통영의 투명한 은빛 물결.

내가 걷던 모든 길은 내 지친 몸과 들뜬 마음을 원시 그대로 받아주었다. 내 생애의 모든 시간을 경유하여 지금의 나로 왔듯이, 길에서 만난 수많은 풍경과 '타자'들을 거쳐 현재의 내가 되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나를 표시하는 증명이며 나의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나 아쉬운 길이 있었다. 1번 국도였다.

내방 창가에서 내려다보면 1번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1번국도 옆으로 이사 온 후 난 그 길이 궁금했다. 우리나라 국토의 첫 번째 길로 호명 받은 상징성이 나를 약간은 흥분시켰다.

전남 목포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국도 1호, 전체길이 1,068㎞, 이제는 경기도 파주까지만 달릴 수 있는 490㎞의 길로 남은 길이었다.

우리나라 도로번호 체계는 홀수는 종단선, 짝수는 횡단선이었다. 국도2호는 목포에서 부산까지의 내륙을 관통하는 횡단 도로이고, 헤어진 첫사랑처럼 고즈넉이 숨어있는 남해의 아름다운 미조에서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가는 길은 3번 국도였다. 생존의 서사와 풍경의 서정을 풍요롭게 품고 있는 7번 국도는 부산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어진 길이었다.

거의 모든 홀수의 국도는 한반도의 허리가 부러진 형상으로 남았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듯이 가 닿을 수 없는 열망을 간직한 채 이별의 상처를 부여안고 있는 길이었다.

이제 1번 국도는 아스라한 추억의 길을 호출하고 있었다. 그 길이 간단없이 이어질 때 난 더 이상 정처 없이 좁은 영토만 배회하며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1번 국도를 통과하여 몽골인이나 흉노, 스키타이 유목민처럼 지평선을 향해 더 먼 대륙을 걸을 것이며 베두인들처럼 태양빛이 쏟아지는 광활한 사막을 누빌 것이다.

길이 또 하나의 길을 부르듯 난 이 봄에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모든 길이 이어질 때 더는 그리워하며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에 난 지금 설레며 기다리면서 더 많이 사랑할 채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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