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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05.25 15:08:28
  • 최종수정2025.05.25 15:08:28

박영희

수필가

애기똥풀 고들빼기꽃 금계 화가 노란 옷을 입고 아침의 문을 연다. 어여쁜 꽃들은 송이마다 사랑과 기쁨 행복과 추억을 머금은 채 해맑게 피어난다. 별처럼 빛나는 꽃들은 어디서 왔을까. 뜰앞에, 모퉁이 길에, 어머니가 가꾸시던 따비 밭 언저리에… 지천으로 피어난 노란 꽃의 유혹에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린다.

모내기를 마친 논마다 어느새 땅 내를 맡은 모들이 홀로서기라도 하는 듯 오롯이 파릇하다. 들녘에 낯익은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아득히 들리는 뻐꾹새 소리에 논에서 써레질하시던 아버지의 초상과 앞치마에 마늘종을 따시던 어머니, 애기똥풀이 피어있던 밭둑에 앉아 망초꽃을 꺾으며 어머니를 기다리던 유년의 내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작은 농사에 여러 자식을 건사하느라 힘겨워하시던 어머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돈이 될만한 푸성귀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마침 모내기가 끝나면 어머니는 같은 동네 사는 외숙모와 해마다 마늘종 장사를 하셨다. 우리 가족들은 손아래 올케와 같이한다는 말에 위안 삼으면서도 온화하신 어머니의 행상에 걱정이 많았다. 온종일 시장을 누비느라 지친 몸으로 저녁에 들어오시던 어머니 몸에서는 매캐하고 눅눅한 풋마늘 냄새가 났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그 옛날의 어머니 냄새로 향수에 젖는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중간고사 날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다. 아이들은 썰물처럼 교정을 빠져나가고 나도 집을 향해 친구들과 무심천 둑 방을 지나 야했다. 저만치 고당 다리가 보인다. 불현듯 끝자락에 마늘종을 파는 어머니와 외숙모 모습이 보였다. 그 길은 피할 수도 없고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길인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당황스러웠다. 친구 몰래 훔쳐보니 손수레에 기다란 마늘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철없던 마음에 왜 하필 우리 학교 근처까지 오신 걸까, 부아가 치밀다가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시던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이 안쓰러웠다. 뙤약볕에 마늘종을 파는 어머니가 측은해 보였지만 혹시 친구들이 알아차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 싶은 생각에, 숨을 죽이다 딴전을 부리며 태연한 척 마늘종 수레 옆을 지나쳤다. 다행히 어머니는 물건을 파느라 나를 보지 못했고 마늘 냄새만 진동하였다. 나는 안도하며 멀찍이 지나와서야 뒤돌아서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봄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 파 뿌리같이 늘어진 허연 머리카락이 은비녀 사이로 애달파 보였다.

그날따라 장사가 안돼 떨이로 넘기고 오셨다는 어머니는 시들어버린 마늘 종다리처럼 지쳐 보였다. 나의 못난 행동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 그날따라 수척해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서는데 "제 자식은 뒤통수만 봐도 아는 겨"하신다. 농축된 말씀 한마디에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내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말씀의 의미는 내 삶에 큰 혜안이 되었고, 그날의 서글픈 풍경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여전히 내 목전에 또렷하다.

봄날이 간다. 마늘종이 한창이다. 어린 손주들과 시장에 나가 마늘 종다리를 한 묶음 샀다. 추억의 향기 너머로 제 자식은 뒤통수만 봐도 안다던 어머니의 봄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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