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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가는 단풍 물결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내 인생의 길목에 또 하나의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옅은 커피 향처럼 플라타나스에서 풍기는 가을 냄새가 좋다. 붉은 잎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늘거리며 몸부림치다 땅 위로 떨어지는 마지막 잎 새의 숨결이 애잔한 가을이다.

해마다 가을이 깊어질 때면 거리에 붕어빵 수레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약국 앞 가로등 밑에 올해도 어김없이 붕어빵 집이 들어섰다. 비닐하우스? 처마 끝에 황금 잉어빵이라고 쓴 천 조각이 바람에 나부끼는 풍경은, 계절이 주는 스산함 때문일까, 아니면 잊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인가, 마음이 애틋하다. 어느새 발길이 빵집으로 향한다. 고소한 냄새를 타고 먼 기억의 갈피에 꽂아둔 추억들이 고개를 든다. 오 십여 년 전, 고1 때였나보다. 친구 주영이는 학교 뒷골목 끄트머리 집 건넌방에서 홀로 자취를 했다. 친구의 자취방을 가는 길목에 처음으로 붕어빵 노점상이 등장했다. 허름한 천을 두르고 연탄 화덕에 풀빵을 굽던 아낙네의 수심 깊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게다가 밥 대신 풀빵으로 허기를 채우던 주영에 대한 가여운 마음은 포장마차의 따듯한 어감보다 서글픈 기억이 앞서간다. 야간자습시간에 교정을 빠져나와 붕어빵을 사 먹다가 선생님께 들켜 심하게 꾸중을 듣던 여고 시절 이야기는 가끔 추억의 책가방 속에서 배시시 웃곤 한다. 빵틀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붕어빵에서 희비가 엇갈리던 우리의 웃음소리가 바스락대는 듯하다. 따끈한 붕어빵을 두 봉지 샀다.

동병상련이던가, 이국만리 캐나다에 사는 딸에 대한 연민인지 몇 해 전부터 C대학의 외국 유학생들에게 우리말 지도와 조언을 해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 인연으로 몽골 유학생 바트치멕 씨와 2년째 한국어 멘토링을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우리 문화와 풍습에 관한 한국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녀지간 같은 사이가 되었고 나는 그녀에게서 몽골을 조금씩 알아간다.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그녀는 우리 집 발치의 낡은 빌라 반지하에 살고 있다. 어린 남매를 고국에 두고 박사과정을 공부하러 온 그녀는 교수지만 학비 조달을 위해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늦도록 불 꺼진 그녀의 방을 지나칠 때면 이방인의 고단한 타향살이가 마음 시리게 한다.

오늘도 지하 방 창문에 불이 꺼진 채 쇠창살만 거뭇하게 보인다. 아직 연구실에 있는 걸까? 아니면 일하러 간 걸까? 그녀의 집 앞에서 문자를 보내니 모텔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늦는 다는 기별이다. 하는 수없이 그녀의 현관 문고리에 붕어빵 봉지를 걸어 놓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풀빵이 서늘하게 식었을 늦은 시각에 전화가 왔다. "영희 박시(선생)! 매우 맛있어요. 당신 고마워요, 이거 이름이 뭔가요"한다. 그녀의 우리말은 어눌했지만 유쾌하게 들렸다. 값싼 풀빵 몇 개로 그녀가 행복해하니 가슴이 먹먹하지만 기쁨이 되는 순간이다.

비루해 뵈는 주인의 행색에 마음이 가엽기도 하지만 맛나게 빚어내는 붕어빵은 적은 돈으로도 사 먹을 수 있는 서민의 간식으로 제격인 셈이다. 누군가 애환과 사랑과 그리움을 나눌 수 있기에 작지만 마음 부른 행복 아닌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해거름의 붕어 빵집에 들러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거기, 따스한 인심이 있다.

마침내 바트치멕 씨는 논문을 제출하고 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귀한 인연과 작별의 시간에 우리는 붕어빵가게를 순례하며 또 하나의 추억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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