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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망초 꽃사이로 석양이 방죽을 붉게 물들여간다. 농익은 능금빛이 고달픈 인생살이에 속으로 삭였을 어머니의 눈물 자국처럼 애달파 보인다. 누구를 고대하던 걸까· 온종일 그리움에 젖은 얼굴로 동구 밖 버스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계시던 어머님, 노쇠한 말년의 모습이 붉은 노을빛 속으로 사라져 간다.

마을 초입에 이르니 어머니가 가꾸던 고추밭이다. "어머니"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큰애야 어서 와라" 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데 푸른빛만 가득하다. 이랑 사이에 들어가 잘 익은 풋고추 하나를 뚝, 따자 어머님 체취가 흐른다.

일생을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흔들리고 흔들려서 푸른빛을 떨 구고 마침내 붉은 빛으로 익어가는 고추에는 어머니의 생애와 닮았다. 여린 고추를 다독이고, 쓰러진 고춧대를 세우셨을 어머니, 눈물을 거름 삼아 가꾸시던 고추밭에서 떠나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본다.

남편은 삼 십 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사업을 했다. 결제대금을 어음으로 주고받던 시절 납품 대금을 어음으로 받았다. 누적되는 어음을 보며 본청업체를 신뢰해 보지만 마음이 불길하다. 마침내 부도 소식이 들렸고 하루아침에 어음은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미 해외로 도주한 그들을 찾을 길이 없었고 망연자실 직원들 급여를 정산해주고 공장을 정리했어야했다. 누구보다 착하고 진실하다고 자부했는데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온 걸까? 신을 원망하며 날아가 버린 돈에 대한 미련과 배신과 분노에 찬 남편은 점점 피폐해갔다.

인생의 쓴맛을 곱씹으며 삶의 의욕을 잃어 가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마침 시동생 내외가 장에 가고 없다며 집에 오라는 목소리가 급하게 들린다. 무슨 일 인가 걱정되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남편의 본가는 아직 산길을 더 가야 하는데 논둑 언저리에 어머님이 나와 계신다. 차를 멈추고 내리자 어머니는 사방을 살피더니 나를 데리고 논 한가운데 볏 짚더미 옆에 몸을 숨겼다. 오늘이 장날이라 둘째 내외는 콩을 내러 가고 없다 하신다. 그런데 왜 집이아닌 논 가운데서 보자는 걸까, 논바닥엔 서릿발만 성성한데 어머니는 볏 짚더미 속에서 고추 자루를 끄집어냈다. 아니 웬 고추를 볏 짚더미서 꺼내주시느냐고 하자 재빨리 네 차에 실으라고 하셨다. 김장 걱정을 하셨나 보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시침을 떼시며 "고추 얘길랑 너랑 나만 아는 게다. 동네 사람 눈에 띄기 전에 어서 가라" 하셨다. 어머니의 어둑한 사랑에 목이 메었다.

자식이 뭐라고 동구 밖 볏 짚더미에 고추를 숨기셨을까, 남의 눈을 살피느라 얼마나 숨죽였을까, 금쪽같은 아들의 부도 소식에 얼마나 우셨을까… 애간장을 태웠을 어머님 앞에 말 문이 막혔다.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기역 자로 굽은 허리를 간신히 펴며 하늘만 쳐다보셨다. 크고 작던 고부간 애증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간다.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어 우리는 짚단 위에 나란히 앉았다. 서러운 마음에 시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나니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던 고통이 실컷 울고 나니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내 등을 다독이시며 "얘야, 울지마라 사노라면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했다. 어머니의 허름한 고추 자루는 금은보화보다 더 깊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라는 말씀처럼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용서할 수 없던 배신과 분노가 점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병색이 짙은 고춧대를 애지중지 세워가시던 어머니의 손은 절대 포기 하지 않는 신념과 의지로 자식들을 세워가는 사랑이었다. 고추가 익어간다. 뙤약볕에 커다란 꽃 모자를 쓰고 고랑을 누비시던 어머니의 굽은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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