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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언제부턴가 에어콘이 아니고는 여름나기가 힘들어졌다. 몸살 앓는 지구를 생각하며 냉방기 사용을 자제하다가 다시 전원을 누르곤 한다. 먼 옛날 대청마루에 불어오던 산들바람과 아버지가 부쳐주시던 부채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자못 한 줄기 바람 아쉬운 날이다.

양푼에 담긴 하얀 감자, 열무김치에 말은 국수를 먹다 입가에 묻은 뻘건 김칫국물 자국,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던 어린 날의 여름 이야기가 떠오른다. 옥수수 이파리와 손수레 모서리에 사뿐히 내려앉은 잠자리를 잡겠다고, 뙤약볕에 온종일 쏴 다니던 유년의 기억에 슬며시 웃음 짓는다.

해거름에 쇠꼴을 베어오시던 아버지의 지게에는 바랭이 엉겅퀴 다북쑥 질경이 강아지풀 같은 들풀이 수북했다. 어디서 따라왔을까, 헛간 앞에 세워 둔 지게 끝에 며느리 배꼽 풀이 덩굴을 길게 늘어뜨린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푸른 잎사귀 위에 청보라 빛 작은 구슬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

땅거미 질 무렵 샘에서는 등목을 한다. 쉰둥이였던 나에게 아버지와의 기억은 대부분 노년의 이야기들이다. 여름이면 가끔 아버지 등에 물을 부어드렸다. 웃옷을 벗은 아버지의 늙고 야윈 몸은 왠지 가여웠다. 앙상한 쇄 골과 등허리에 낮고 높은 등고선은 힘겹게 살아온 지난 세월을 엿볼 수 있었다. 비누를 칠해 등을 문지르다 바가지로 물을 부으면 비누 거품이 등줄기를 타고 부서져 내린다. 잠시나마 삶의 등짐을 씻은 듯 "어휴 시원하다 시원해" 윗니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으시던 자상한 아버지,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

어머니는 마루 끝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국수를 빚으신다. 말랑말랑한 반죽을 긴 도마 위에 놓고 국숫발을 똑 고르게 쓰시던 어머니, 그 곁에 서서 국수 꽁다리를 기다리던 어린 동생과 내 모습이 무더위 사이를 기웃거리며 지나간다. 마당에 걸어놓은 양은 솥단지에 밀짚으로 불을 지펴 한솥 가득 사랑을 끓여내시던 어머니의 누른 국, 온 가족이 댑싸리 나무 옆에 놓인 들마루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면 우리의 웃음꽃은 담장에 핀 호박꽃처럼 담을 넘는다.

어둠이 내리면 마당 끝에 모깃불을 피웠다. 억새와 질경이, 쑥을 태우는 모깃불 냄새가 온 집안에 알싸하다. 맑게 읊어대는 풀 벌레 소리는 한낮의 더위를 달래며 여름밤의 운치를 더한다. 칠월칠석이 되면서 간식으로 복숭아를 먹던 기억이 난다. 마을 어귀에 과수원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한 대야씩 사 오시던 복숭아는 성한 게 없고 흠집이 나고 무른 것들이었다. 어두운 밤 흐릿한 불빛 아래 벌레 먹은 복숭아를 먹으며 "예뻐진다는 둥, 영양분이 많다 등"의 말을 믿고 행복했다. 어려운 상황에도 남다른 해학으로 웃음을 자아내시던 아버지만의 유쾌한 지론(?) 덕에 오늘 우리가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달빛이 머문 들마루에 누워 오손도손 이어가던 우리들의 지고지순한 이야기… 타버린 모깃불은 하얀 재를 남기고, 화단에 핀 꽃 그림자만 달빛 사이로 담벼락을 기대고 서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이 작은 기억들이 떠나가지 않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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