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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삼십여 년 일하던 약국을 퇴직하자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강박감이 찾아왔다. 여행 문학 악기 배우기 같은 고상한 삶을 나열해 보지만, 정작 마음은 지적 허영인 듯 조바심만 더한다. 보다 못한 친구가 함께 걷자며 불러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기도와 같다"는 말이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나간 삶의 궤적들이 기도 제목처럼 고개를 든다. 나는 영혼의 묵은 때를 씻는 구도자처럼 묵언으로 기도하며 길을 걷는다.

초록이 싱그럽다. 가경 천 둑 방에 수목이 우거진 숲길을 간다. 나무 그늘 속으로 불어오는 푸른 바람이 시원하다.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을 한 모금 마셔가며 느릿하게 걸었다. 개천에 놓인 징검다리는 긴 가뭄에 덩그러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아버지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던 개울가 추억이 어슴푸레하다. 웅덩이 옆에 날개를 파닥이는 두루미 한 마리는 먹이를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다. 홀로 나온 백조 모습이 외로워 보이는데 먹이를 찾았는지 훌쩍 날아갔다. 조용한 숲에 이름 모를 들새들의 향연이 한낮의 음악처럼 하모니를 이룬다.

어느덧 살구, 자두, 복숭아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숲길 중반에 이르자 살구나무 길이다. 봄날 아름다운 꽃을 드리우며 사람의 마음을 끌더니 어느새 나뭇가지마다 살구가 다닥다닥하다. 입속으로 새콤하니 군침이 돈다. 노란 살구가 머리 위로 '툭' 하고 떨어진다. 산책로 바닥에 황금색 살구가 낭자하다. 낙하한 살구들이 발아래 무더기로 쌓여있다. 새콤하고 달콤한 살구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나도 모르게 노을빛처럼 잘 익은 살구 하나를 골라 솜털을 닦자 오염된 가로수 과실은 먹을 수가 없단다.

너도나도 어렵게 살던 시절, 산과 들로 다니며 오디와 산딸기로 배를 채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 많은 살구를 그대로 버린다니 안타깝다. 무더기무더기 쌓여있는 살구에 임 할머니 생각이 난다.

약국에 단골로 오시던 임 할머니는 구순의 동네 최고령이시다. 연세보다 매우 정정하시고 총기도 밝으며 걸음걸이가 아담하시다. 칠순 넘은 아들이 아직도 아가로 보인다며 아들을 위해 영양제를 사시는 할머니의 모성은 지극하다. 울 안에 살구나무가 있다며 "선생님께 살구를 갖다 드려야 하는데" 하시곤 누구 눈치를 보는 듯 말끝을 흐렸다. 괜찮다고 해도 아니라는 할머니의 갈망은 진심으로 보였다.

어느 날 살구를 가져오셨다며 조제실로 들어오신다. 손은 빈손인데 과연 살구는 어디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더니 며느리 몰래 갖고 오느라 고쟁이 속 주머니에 넣어 왔다신다. 노인의 따뜻한 인정에 놀라 몇 번을 울컥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눈물 어린 사랑에 말없이 할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쪽을 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는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 것같이 포근하다. 할머니 몸에서 잊었던 어머니의 묵은 체취가 나는 듯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작은 선물에 알 수 없는 훈훈함이 밀려왔다.

고쟁이 속에서 봉지를 꺼내신다. 하루 이틀이 지난 듯 여나문 살구들이 짓무르고 쭈그러진 채 나를 향해 키득키득 웃는다. 노인의 애정에 가슴이 뭉클하고 먹먹했다.

할머니의 심장과도 같은 살구 맛을 본다. 향이 진하다. 새콤한 맛, 떫은맛, 달콤한 맛이 입속에 교차한다. 살구 하나에 할머니의 인생이 들어있는 듯하다. 신랑의 바람기에 속앓이하고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는 환갑도 못살고 간 남편이 야속하다는 할머니, 무지하고 무능했던 시절의 한숨 자락은 이제 농익은 살구 맛처럼 말년은 나아 보였다.

살구 물이 든 산책로 끝자락에 서 있다. 걸어온 숲길을 돌아본다. 발걸음 사이로 땅에 떨어진 살구들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살구의 꿈을 들어 줄 수는 없는 걸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살구의 빛바랜 꿈이 허공 속으로 쓸쓸히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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