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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햇살이 방싯거리며 뜰 안에 봄을 펼친다. 오도카니 앉아 화사하게 쏟아지는 봄볕을 쬐니 겨우내 움츠린 심상에 봄이 스며든다. 설레는 마음으로 빈 화분을 화원에 가져가 꽃모종을 심어 왔다. 종이꽃 사계 국화 수선화 마가렛, 월동을 한 식물들과 여리여리 한 애기풀꽃들이 어우러지니 베란다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지난 설에 친정에 갔다가 여든이 넘으신 큰올케가 담가준 고추장 항아리와 묵은 독들을 씻어 곁에 놓고 보니 고향의 오래된 장독대 풍경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간장독에 비치던 어머니의 얼굴을 만지듯 둥근 고추장 단지를 껴안아 본다.

북향인 우리 집은 뒤 안에 장독대가 있었다. 담 밑으로 머위 순이 나고 옹기종기 놓인 장광의 항아리들은 여럿 형제인 우리 식구들 마냥 도란거리듯 보였다. 가난한 보릿고개

시절 장독은 얼마나 귀한 살림 밑천이었을까? 금이 간 항아리엔 거미줄사이로 가끔 달빛이 머물다 갔고, 바닥에 고인 빗물은 속으로 삼켰을 어머니의 눈물처럼 찔끔거렸다. 흙속에 묻힌 깨진 항아리에 꽃씨가 날아와 분꽃이 피던 유년의 기억들은 초로의 가슴을 어루만져 준다.

시골집엔 안마당에, 뒷간 가는 모퉁이에 살구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마을을 밝히듯 살구꽃이 환하게 피어오르면 농가마다 봄맞이에 한창이다. 아버지는 추녀 밑에 묵은 제비집을 털어 내시고, 양지바른 곳에 호박 구덩이를 파서 씨앗을 심는다. 어머니는 목이 긴 항아리를 골라 농번기에 쓸 농주를 빚는 일을 먼저 하셨다. 하얀 술밥위로 연분홍 꽃잎이 하늘거리던 기억은 해마다 살구꽃이 필 때면 그리운 조각처럼 내 마음에 흩날린다. 조붓한 색경 앞에 앉아 쪽진 머리에 가르마를 매만지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경건해 보였다. 흰 고두밥에 조용히 누룩을 비비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앞날을 기원하는 치성으로 보였다. 아마도 평생의 어머니 기도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건 아닐까,

물을 부어 꽃잎을 띄운 술 단지는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둠을 견디며 익어간다. 보름쯤 지나 "꼬록 꼬록"술 익는 소리가 들리고 봄 언덕의 아지랑이처럼 술 냄새가 피어났다. 달짝지근하게 풍기던 술 냄새에 어른들 몰래 뚜껑을 열고 술 찌개미를 먹던 유년기의 추억을 생각 할 때면 지금도 실소가 절로난다.

술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지나치면 화를 부르기도 한다. 또 몸에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필요약과 필요악이 되는 술을 즐길 때에 중용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시인 도연명은 술을 "망우물" (온갖 시름을 잊는 물건)이라 했다. 인생의 괴로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술로 근심을 잊는다는 의미일 게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농주는 망우물이 되기도 하고 인정 많던 어머니의 술은 가난한 농심에 약주가 되고 희망의 가락이 되었다. 모내기철에 온 동네 이웃들이 논둑에 앉아 새참으로 즐기던 풍경속의 걸쭉한 사발 주, 뻐꾸기 소리 들리는 밭이랑에서 반주를 드시던 늙으신 부모님의 모습은 괜스레 가슴이 시려온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햇살이 고운 봄날, 부모님을 뵈러 고향 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술독에 용수를 넣고 술을 거르시다 성년이 된 나에게 말간 동동주를 한 모금 건네셨다. 희로애락을 우려낸 어머니의 곰삭은 시간들이 입안을 알싸하니 감싸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 했다. 그러고는 거른 술을 병에 담아 신문지로 감싸며 올라갈 때 병원 식구들에게 맛이나 보이라고 담아 놓으셨다. 이튿날, 어머니가 빚은 술은 내 손에 들려 한양 길에 올랐다. 한 모금의 술로 조촐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시골이 고향이신 민 선생님, 정 선생님 평소 술을 즐기신다는 김 과장님까지 흙내 나던 어머니의 그리운 맛이라며 과찬을 했다. 나는 격변기를 사느라 가난하고 비루했던 어머니의 인생이 드디어 날개 짓을 하는 듯 축복의 찬가로 들려왔다. 고향을 담아 한 잔술에 마음을 나누던 그날 이후 직장의 분위기는 한껏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였다. 어쩌다 내가 고향집에 내려가는 날이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동동주 타령으로 줄을 이었다. 마음을 담아 빚던 봄날의 어머니 술은 만고풍상의 고뇌와 시련들을 삭이고픈 희망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여기 저기 화사하게 살구꽃이 핀다. 나의 봄은 어떻게 오고 있을까," 산에 들에 꽃이 핀다고 봄이 아니요, 미움과 원한의 얼음장이 녹아야 봄이 오는 거다"라는 시인의 시구를 펼쳐본다.

제 것만 챙기려는 위정자들 앞에 평범한 소시민의 삶은 유린당한 듯, 소망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민초들의 한숨소리가 짙어만 간다. 서로가 마음의 빗장을 열고 누군가의 시린 가슴을 봄의 숨결로 다독여 줄 수 있다면 세상은 꽃등을 켜듯 환해질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희망을 안고 저만치 꽃을 피운다. 파뿌리처럼 허연 머릿결로 고적한 툇마루에 앉아 농익은 술에 꽃잎을 띄우고 시조가락을 읊으며 봄날의 소회를 즐기시던 늙으신 부모님의 맑은 가난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피어나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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