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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가녀린 햇살이 창틈으로 들어온다. 유리 벽 사이로 오롯이 내리는 봄볕은 죽은듯한 수국의 마른 가지에 파릇한 봄을 열고, 소복하게 자라난 어린잎들은 겨울 뜨락에 봄을 수 놓아간다. 어디 그뿐 인가 마가렛 나무에도 생명이 꿈틀거리며 한 송이 두 송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요 며칠 정지된 삶에 은은한 향기로 다가온다. 나는 허리받이가 긴 원목 의자를 거실 끝에 옮겨 놓고 오도카니 햇살과 마주 앉았다.

창궐한 코로나로 인해 가족 모임을 미루던 차에 방역 패스가 해제되고 거리 제한을 완화한다는 소식이다. 지루하고 답답하던 일상에 그나마 최소한의 자유를 허용하다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긴 기다림 끝에 오랜만에 갖는 가족 식사 자리가 너무 성급했나, 아니면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우리를 질투한 걸까, 시차를 두고 한 검사결과는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주와 나까지 코로나 확진으로 나왔다. 해외로 출국을 앞두고 있던 딸네 가족에게 갑작스러운 격리상황은 여러 갈래로 소용돌이쳤다. 차라리 출국 전에 걸린 것이 다행이다는 긍정의 생각도 있고, 치료와 회복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설왕설래했다. 심한 몸살 때문에 흐느적대다가 온몸이 쑤시고 아픈 근육통을 동반하더니 차츰 누그러졌다. 건강한 증거인가 나에게 코로나는 그리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

베란다 너머로 목련 나뭇가지마다 오 촉짜리 전구에 불을 밝히듯 하얀 꽃망울이 봉긋봉긋 줄지어 피어 있다. 희고 고운 꽃물결이야말로 순결한 신부의 옷자락처럼 매우 고혹적이다. 살며시 흩어지는 꽃잎 끝으로 젊은 날 꽃그늘에 앉아 시를 읊던 우윳빛 추억이 머물다 사라진다. 낭창낭창 휘어진 꽃가지에 빛바랜 그리움 하나 걸어두고 긴 상념에 빠져본다. 세상과 단절된 탓일까? 바깥에 펼쳐진 봄의 향연이 더욱 간절하다. 두문불출의 격리상황에 삼시 세끼 딸들이 현관 앞에 보내준 배달음식과 지인들이 보내준 다양한 죽들이 일주일간 효자 노릇을 했지만 아플 때면 생각나는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던가 이유 없이 열이 나고 며칠을 앓아누웠다. 금계랍이라는 매우 쓴 가루약을 만병통치약으로 쓰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열 감기인데 딱히 약이 없어 학교도 못 가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복숭아 간스메(통조림)를 구해 오셨다. 밥맛을 잃어 식음을 전폐하는 때 달콤한 백도 통조림은 묘약이 되었던 게다. 그 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나의 병세를 보다 못한 앞집할머니가 아들이 서울에서 보내온 간스메를 주셨다고 한다. 앞집과 우리는 낮은 울타리로 담을 공유하고 있었다. 담장 사이로 사랑을 주고받던 금영이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떠오른다. 아무런 문명의 혜택도 없이 어둑하게 살던 선조들이건만 이웃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온정을 베풀던 옛 시절의 우리네 풍습이 그리워진다.

낯선 전화가 왔다. 산남동에 있는 치킨집인데 아파트 동호수를 묻는다. 사연인즉 수필을 지도하시는 노 교수님께서 우리 집으로 치킨을 주문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빚을 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문학회 일로 전화를 드렸다가 코로나 이야기를 잠시 비친 것뿐인데, 보잘것없는 제자에게 여든의 어르신이 치킨을 보내신다니 스승의 어지신 마음에 민망하고 감사한 마음이 교차했다."수필엔 정이 담겨야 참다운 글맛이 난다"시며 글보다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교수님이야말로 한 편의 아름다운 수필이 아닌가, 한 조각 치킨을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드리며 맛을 본다.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녹여낸 듯 매콤하고 달달한 맛에 잃었던 입맛을 되찾고 어느새 코로나도 나를 떠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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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