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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산책로 양지녘에 살포시 얼굴을 내밀며 봄 까치 꽃이 웃는다. 아기 손톱처럼 조그맣고 앙증맞게 핀 봄꽃은 마치 그리운 이에게서 온 봄 편지처럼 반갑고도 설렌다. 혹한 추위도 이겨내고 언 땅을 비집고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리는 가녀린 풀꽃에서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의 봄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던 나의 고향은 야트막한 산자락이 삼태기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틈만 나면 산에 올라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하늘소를 잡고 놀던 오래 묵은 추억이 아직도 어렴풋하다. 들길을 따라 지천으로 피어나던 이름 모를 풀꽃들, 개울가에서 송사리 떼와 멱을 감고 놀던 어린 날의 동심은 세상을 순수하게 보는 혜안을 터득한 셈이다. 삘기를 뽑고 마름을 까먹던 시골이라는 고향이 준 선물은 나에게 특별한 은총이 아니었던가, 어느덧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릴 적 궁색해 뵈던 단상들이 인생의 뒤안길에 정다운 미소를 보낸다.

직장을 따라 타지로 떠나던 날, 아침 안개 내리는 들녘의 논둑길을 걸으며 나를 배웅해 주시던 아버지의 유별난 사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딸을 외지로 보내는 대견스러움과 노파심에 눈시울 붉히던 아버지의 눈물…. 내가 탄 버스가 꼬리를 감출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시던 그때의 잔상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아롱져있는 풍경이다.

재개발이라는 미명에 고향의 산과 들과 가옥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농사밖에 모르던 고지식한 노인들은 늘그막에 도시계획이 웬 말이냐며 정색을 했다. 정작 고향을 떠나간 세대는 보상 소식을 반기는 눈치였고 긴 세월 흙에 묻혀 살아온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태고에 있었을 마을 초입의 황토 산은 평지가 되고 개울가에 피어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흙냄새만 맡으며 어둑하게 살던 고향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낯선 주인은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던 장 고개도, 놀이터 삼아 놀던 언덕 위에 작은 예배당도 허물어져 찾을 길이 없었다. 도란도란 정을 나누던 마을은 관공서가 들어서고 하늘 높이 고층 아파트단지는 빌딩 숲으로 거듭났다. 구멍가게 하나 없이 살뜰히 살던 부모님 세대에게 변화한 거리는 아마도 신세계였을 게다. 소박하던 고향의 옛 정취를 기억해내며 나는 이방인처럼 고향의 새로워진 거리를 배회해 본다.

형제간 살을 비비며 정겹게 뒹굴던 우리네 집터는 어디였을까, 저기일까? 아니면 더 위쪽이던가? 방죽말을 끼고 흐르던 물줄기를 더듬어 우리 집 자리를 가늠해본다. 저만치 바깥마당으로 작은 텃밭이 있었고 그 옆에 늙은 대추나무가 한그루 있었지, 대추나무에 걸어둔 고향의 후덕한 이야기가 문득 그리워진다.

삶이 가끔 허기지다 싶을 때, 괜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 무심코 찾아갈 고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좀 투박하니 세련되지 않아도 정을 나누며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고향이 나를 반겨줄 텐데….

황혼이 깃든 나이 때문인가, 자꾸만 고향 생각이 간절해진다. 한쪽 귀퉁이만 남겨진 조붓한 산자락으로 걸음을 옮긴다. 무심한 땅에 봄 내음만 싱그럽다. 잠시 산마루에 서서 애틋했던 추억들을 읊조리며 향수에 젖는다. 먼 옛날 신작로를 달리던 악동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딸들이 그리는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콘크리트 벽 사이로 다니던 학원가와 문방구 pc방 패스트푸드점...괜시리 삭막한 기분이 든다. 나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 고향의 끄트머리에서 흐릿해 가는 옛 풍경들을 뇌리에 새기며 지나는 길손에게 내 고향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른 새벽, 벌목을 시작하는 요란한 굉음이 잠을 깨운다. 우리 집의 정원처럼 거실과 마주하고 있는 구룡산이 아파트단지로 개발을 한단다. 숲에 스러져 가는 나무를 보며 상수리나무를 타고 재롱을 부리던 다람쥐와 청설모는 다 어디로 갔을까, 땅속에 숨겨둔 도토리는 챙겨 갔을까? 측은한 마음에 가슴이 저며오는데 갈 곳 잃은 새 한 마리마저 베란다 난간에 앉아 구슬피 운다.

가끔 문명의 진화는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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