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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신록이 나풀거리는 교정의 오후 음악실 창가에서 부르던 가곡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시조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시던 아버지의 초상은 내가 노래를 좋아하게 된 동기가 되었나 보다. 한이 담긴듯한 아버지의 구성진 목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질 때면 어린 나도 덩달아 시조 가락을 흥얼거리던 오래된 풍경들이 미소를 짓는다. 학창시절 중창단 활동과 모 방송국의 성인 합창단까지 노래는 오랜 세월 나와 함께했다. 사오 십여 년 동안 교회의 성가대를 섬기며 봉사해온 시간은 행복으로의 초대였으며 신앙을 지키는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다음 주 성가를 위해 주일예배를 마치고 대원들이 연습실에 모였다. 매주 준비하는 성가곡에는 만든이의 신앙 고백을 음미하며 새로운 곡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휘자의 해설과 함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듣기를 먼저 했다. 오늘 선곡은 곡 전체의 흐름은 호숫가의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다가 후렴 부분에서 박자가 빨라지며 다소 까다로웠다. 딱히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닌 내가 악보를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지만 어쩌다 초견에서 오류가 생기면 그 습관을 고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계속 노래를 부르며 연습을 반복해보아도 여전히 박자가 난해하다.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박자를 기억하려고 몇 번이고 흥얼거렸다.

마침 딸이 집에 들른다기에 레슨을 부탁하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유유히 흐르는 반주에 맞춰 내 노래도 무난하게 흘러간다. 곡 중간에 8분음표와 16분음표의 이음줄을 터치하고 가야만 하는데 잘 되지 않자 괜히 작곡자의 악상 탓을 해 본다. 머릿속으로 박자를 세며 한 음절씩 가다가 음표의 길이 대로 소리를 다 내지 못하고 마음이 급해 반 박자씩 미리 들어갔다. 몇 번을 그 부분에서 계속 틀리자 음악 교사인 딸이 학생들 중에도 성격이 급한 애들이 박자보다 빠르게 들어가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엄마! 안단테 칸타빌레, 천천히 노래하듯이 예요, 자 다시 불러보세요." 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악상기호를 살리며 천천히 노래하듯이 반복해서 부르자 어느결에 아름다운 성가곡이 완성되었다.

'안단테 칸타빌레'는 차이콥스키의 현악 4중주곡 제1번 2악장에서 나온 말이다. 차이콥스키가 31세 때,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 누이동생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느 날 밖에서 들려오는 난로 수리공의 콧노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곡은 '소파에 앉은 바냐'라는 러시아 민요라고 한다. 아름다운 소녀 바냐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청년 이반의 마음을 노래한 곡을 차이콥스키가 채보했다. 톨스토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환영의 자리에서 안단테 칸타빌레가 연주됐었을 때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그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내가 클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교정에 클래식과 가곡이 울려 퍼졌다. 즉흥 환상곡 녹턴 숭어, G 선상의 아리아 사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애잔하고 탐미적이며 우아하고 격정적인 클래식을 감상하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던 소녀 시절의 추억들이 오선지 위에서 춤을 추는 듯하다. 두 딸이 피아노와 첼로를 전공하다 보니 집안에 늘 악기 연주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순간이기도 하다. 천천히 노래하듯이, 내 삶의 여정에 안단테 칸타빌레 악상기호를 다시 그리며 나직이 나의 노래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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