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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아파트 단지 안에 정원수마다 단풍 옷을 갈아입은 풍경이 몽환의 숲처럼 황홀하다. 형형색색 현란하게 물든 잎새들이 마치 꽃 대궐을 보는 듯싶다. 벚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화살나무, 저마다 오묘한 색깔로 가을을 빚어내는 요즘, 이렇게 고운 빛은 어디서 오는 걸까. 경이롭다. 고혹한 가을의 향취에 빠져 소파 끝에 오롯이 앉아 숲을 본다. 이따금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붉은 잎새에 마음이 착잡하다. 구름이 점점 짙어지더니 또록또록 참나무 잎새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고적한 나무숲에 가을비가 내린다. 단풍 비가….

마침 외손녀의 하교 시간이 가까웠다. 비 소식이 없어서 아침에 우산을 챙기지 못하여 서둘러 학교로 향한다. 외손녀의 학교에 우산을 갖고 가는 건 처음이다. 야릇한 설렘이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젖은 흙냄새에 나뭇잎 냄새까지 가을비 향기가 좋다. 빗방울이 어느새 우산 속으로 들어와 내 얼굴에 비벼대는 감촉이 간지럽다. 교실 근처에서 아이를 기다리자니 아주 먼 옛날 비 오던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1970년 여중 1학년 때의 일이다. 느닷없이 마지막 수업 시간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집에 갈 걱정을 하며 하는 데 골마루에 아버지가 보인다. 육 남매에 늦둥이 외동딸이던 나를 아버지는 유난히 예뻐하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비 맞을 일이 안쓰러웠던지 농로를 지나 삼사 십분 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오셨다. 할아버지같이 보이는 늙으신 아버지는 들 일을 하다 오셨는지 무릎까지 걷어 올린 잠뱅이 차림에 젖은 모시 적삼이 남루하다. 우산을 들고 창문을 기웃거리며 당당히 딸을 찾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상한 부성애보다 수치스러움이었다. 단번에 아버지를 본 나는 부끄럽고 창피하여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 정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아버지를 모른척하며 그냥 비를 맞고 걸었다. 내 눈치를 살피며 발치에 따라오시던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학교를 다 지나 고당 다리까지 와서야 우산을 받쳐 들었다. 나는 집으로 오는 동안 내내 투덜거리며 차라리 비를 맞고 갈 테니 다시는 학교에 오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껄껄 웃으시던 아버지는 그 후로도 비가 오는 날이면 여전히 정문 앞에서 멀찍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땐 늙고 가난한 농부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만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을 창피하다고 보았으니 얼마나 무지한 행위였던가.

늘 나를 최고로 높여주고 사랑하시던 아버지는 내 결혼을 얼마 앞두고 위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건강을 잃은 아버지께 그때의 불효가 제일 사무쳤다. 점점 야위어 가는 아버지께 그날의 참회록을 써서 읽어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아버지는 앙상한 몸으로 나를 다독여 주시며 도리어 미안했다고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신부 입장을 할 때 파르르 떠시던 사랑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내 차림새를 살피는 사이 나를 발견한 외손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할미를 부른다. 해맑고 순수한 아이를 보며 밭머리에 수숫단을 세우시던 농부 아버지의 잔영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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