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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가을향기 머금은 구절초 꽃이 풀 섶에 살랑거린다. 꽃 이름을 불러 달라는 듯 구월의 느린 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는체한다. 어느새 가을, 해마다 이맘때 펼쳐지는 들녘의 고적한 풍경이 내 산문에 가을의 첫 줄을 쓴다. 흰 구름과 바람과 누렇게 바래진 들풀들, 둔덕에 오롯이 피어있는 가을 들꽃이 나는 좋다. 아마도 어릴 적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부모님의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작은 행복 때문인가보다.

구월이 오면 검게 탄 얼굴로 신작로를 달리던 동무들 생각이 나고 깊은 산속으로 구절초를 뜯으러 다니시던 초췌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헛간과 빈 외양간의 여물통 그리고 그늘진 뒤란에 촘촘히 펼쳐있던 우리 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집 안 구석구석 널어놓은 떫은 약초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머무는 듯하다. 울안에 가득하던 쓰디쓴 구절초 향기는 어머니 아버지의 고단한 냄새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힘겨웠던 부모님의 고뇌가 점점 깊게 느껴지다니 때늦은 후회만 앞서간다.

삶의 고지가 얼마나 험난했던가, 온순하신 어머니가 거칠고 남루한 행색으로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점심밥 한 줌을 싸서 먼 산을 향해 버스를 타러 가시던 뒷모습이 어린 가슴을 아프게 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으슥해야 지친 몸으로 돌아오시던 어머니. 리어카를 끌고 마중 가시던 아버지의 심정 역시 얼마나 암담했을까, 산모퉁이를 돌아 마당에 들어선 구절초 자루는 산속을 헤매느라 옆구리가 터지고 성한 데가 없었다. 지나간 그때를 생각하면 질곡의 삶을 살아내시던 부모님이 안쓰럽고 가엽기만 하다. 동구 밖을 천천히 걸어오시던 부모님의 초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고단한 삶의 무게를 감당하시느라 남모르게 흘렸을 부모님의 눈물을 헤아려본다.

이튿날 식구들끼리 구절초를 엮는다. 풀어헤친 자루 속에는 산속의 적막과 고요와 어머니의 고뇌가 들어 있었다. 나와 오빠들은 조막만 한 손으로 구절초잎을 한 움큼씩 바닥에 챙겨 놓았다. 아버지는 한갓 한갓 짚으로 구절초를 엮어 헛간 서까래에 촘촘히 걸었다. 빈 지게에도 삽자루 끝에도 집안 곳곳에 널어 둔 우리 집 초가을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애잔하다. 어린 손끝에도, 아버지 옷섶에도, 오랫동안 쓰디쓴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아홉 번을 꺾이며 자란다는 구절초는 생의 마디마디 쓰리고도 아팠을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파랗던 이파리들을 마른 쑥 빛깔이 될 때까지 그늘에 말린다. 앙상하게 마른 구절초 단들을 정갈하게 싸놓은 광경은 산더미처럼 보였다. 한번 피었다 지는 우리네 인생처럼 마침내 마른 구절초에 고요가 흘렀다.

가을걷이를 끝낸 어머니는 다시 장으로 나가신다. 점점 한기가 도는 계절, 구절초 다발을 머리에 이고 장고개를 넘던 어머니 모습이 가련했다. 아니 추운 겨울 누추한 모습으로 시장 골목에서 구절초를 팔고 계시던 어머니…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고 슬쩍 도망치던 학창시절의 내가 두고두고 미안하다. 어느덧 산더미같이 쌓아둔 구절초는 바닥을 보이고 구정이 될 즈음 구절초 장사는 끝이 났다. 척박한 삶에 육 남매를 키워내느라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던 어머니의 생애는 고매한 철학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닌가.

추석을 맞아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선산으로 향했다. 산에 오르자 부모님의 산소 옆으로 공교롭게도 소풍을 나온 듯 구절초 무리가 보인다. 하늘거리며 피어난 구절초 꽃을 보니 지나간 기억 속의 어머니를 뵙는 듯하다. 자상한 어머니를 만난 듯 반갑고도 신기했다. 바람결에 옅은 구절초 향이 지나간다. 생전의 어머님 체취를 느껴본다. 처절한 삶의 순간에도 결코 포기 않고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우려내시던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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