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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파릇한 봄 풀들이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운다. 봄 까치 꽃, 꽃다지 냉이꽃 양지꽃, 꽃들은 내 발걸음 소리를 아는 걸까. 해마다 산책로 그 자리서 봄을 밝히며 나를 보고 아는체한다. 살그머니 귓속말을 건네는 풀꽃들의 봄 인사가 반갑고도 신기하다. 언제 보아도 귀엽고 앙증맞은 풍경에서 봄날의 시 한 편을 읽는다.

작은 외손녀가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아이를 보며 할미 마음은 기쁨과 설렘 그리고 괜한 노파심이 앞선다. 입학 선물로 예쁜 구두를 사주기로 약속했다. 신발은 앞으로 나간다는 의미이고, 길을 나서면 길잡이가 되는 것이 신발 아닌가. 많은 물건중에 굳이 신발 선물하려는 뜻은 생의 소중한 출발에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또 한 꿈을 향해 나갈 때마다 아이가 만나는 비바람과 눈보라 앞에, 겁내지 않고 담담히 가던 길을 가주길 바라는 여느 할미의 간절함 같은 게다.

신발은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으나 그 사람의 지위와 신분 그리고 빈부 직업이 함축해 있기도 하다. 손주들과 구두를 사러 백화점엘 갔다. 매장마다 아름답고 화려한 신발들이 즐비하다. 곱게 차려진 진열대 너머로 어린 날의 기억들이 가물거린다. 문득 "신발을 꺾어 신지 말아라" "끌지 말고 사뿐히 걸어라" "끈은 항상 단정히 묶어야 한다"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신발 문수가 내 발보다 커서 헐떡거리던 8문짜리 기차표 검정 고무신, 비 오는 날 산모퉁이를 걸을 때면 질펀한 황톳길에, 벌러덩 누워버린 코 납작한 신발이 저만치서 웃고 있는 듯하다. 훌러덩 벗겨진 신발 덕분에 어린 내 발바닥은 진창길을 헤매던 추억이 쓸쓸히 스치고 간다. 그래도 우습고 서글픈 유년기의 검정 고무신은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마을의 산과 들과 개울물 그리고 진흙탕에 디딤돌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떠받쳐준 내 삶의 바탕이 된 셈이다. 고단한 하루를 씻듯 물기를 말리며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 아직도 생생하다. 뒤 축이, 신발 지문이 닳고 닳은 아버지의 신발은 처절했던 삶의 굴레였다. 가장의 무게를 견디느라 자갈길 비탈길 마다하지 않고 죽어라 일 만하시던 아버지, 때로는 돌부리에 걷어차이고 가시밭길 진흙탕 길을 걸으면서도 묵묵히 참아내시던 아버지의 신발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밀려왔다.

어둑하기만 하던 시절도 차츰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여고생이 된 나는 비로소 기성화라는 구두를 갖게 되었다. 처음 신어본 서양식 단아한 구두에 발뒤꿈치가 까지던 아픔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낡은 고무신, 허름한 운동화, 양화점 그리고 맞춤 구두에서 황혼의 기능성 신발까지, 한 켤레의 신발 속에 우리네 인생이 담겨있다. 신발이 너무 커서 신발 안에 들어온 모래알을 털어내던 일, 처음 신게된 운동화가 너무나 가슴 벅차 머리맡에 두고 며칠을 만지작거리던 추억, 엄동설한에 발 시리던 날도 많았었다. 돌아보면 그래도 행복이었다. 마침내 외손녀는 빨간 구두를 신고 거울 앞에서 앳된 걸음을 걸어 보인다. 아이가 내려갈 길 위에 써 서사는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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