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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친구 여식의 결혼식에 가려고 축의금 봉투에 '축 화혼'이라고 쓴다. 그렇다고 내 글씨가 빼어나게 잘 쓰는 명필은 아니다. 반듯한 인쇄 봉투를 마다하고 굳이 손 글씨를 고집하는 이유는 어렵사리 손편지를 쓰시던 어머니 글씨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따금 컴퓨터 자판으로 쓰는 정형화된 글씨에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동글동글한 내 손 글씨가 좋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펜글씨 연습을 하는 나에게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이고 얼굴이다." 시며 내면을 갈고 닦듯 한 자 한 자 똑바로 쓰라시던 아버지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셋째 오빠가 해병대에 입대하고 얼마 지나 청룡부대로 월남전에 파병되었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고 가슴 졸이며 눈물을 삭이던 부모님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도 슬프게 다가왔다. 힘겹고 막막하던 세월에 목숨을 담보로 타국에 아들을 보낸 부모님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라디오로 베트남의 전쟁 소식을 듣는 게 전부였으니 서로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은 오직 편지뿐이었다.

어느 날 청룡부대에 같이 갔던 남주동 사는 김 병장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던 중에 오빠한테서도 연락이 끊겼다. 소식을 기다리던 우리는 월남에 있는 오빠에게 식구 수대로 편지를 쓰기로 한다. 어깨너머로 까막눈을 면했다는 어머니도 주저 없이 편지를 쓰겠다고 하셨다. 애타는 모성이 무지를 초월한다.

어머니의 글씨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온 가족이 방에 모여 오빠에게 편지를 쓰던 그 날, 무학이셨던 어머니가 흘렸을 눈물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의 강이 되어 흐른다. 쉰 살에 처음 잡은 어머니의 연필이 손아귀에서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심오한 순간인가. 마지막 보루였던 어머니의 자존심은 수치를 모른 채 아들을 향한 모정만이 강렬했다. 획을 긋는 어머니의 손이 누런 종이 위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 서두에 "아들 아"자를 쓰기로 하신 어머니는 자음 한 자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연필 끝에 수없이 침을 바르시며 시간을 끌었다. 한참 만에 이응(ㅇ) 자를 간신히 그린 어머니, 남몰래 흘렸을 어머니의 눈물이 자식들 가슴에 이슬처럼 내렸다.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어머니의 손편지는 마침내 아버지의 손을 포개고 한땀 한땀 그려가며 저녁나절에야 끝을 맺었다. 글자 한 자마다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어머니의 편지… 이역만리 전쟁터로 간 아들을 향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어머니의 사랑이 오롯이 그려졌다. 진액을 쏟은 어머니의 글씨는 상형문자처럼 희로애락의 서러운 춤을 추었다. 뭉툭한 손끝으로 보낸 어머니의 편지는 답장이 왔다. 가슴 조이며 궁금해하던 오빠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우리 가족은 또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국어책을 놓고 밤마다 아버지와 쓰기 연습을 하셨다. 호롱불 아래서 어머니를 위해 운을 띄우시던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듯하다. 더디고도 힘겨운 어머니의 손편지는 오빠가 군 복무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글쓰기에 흥미를 느꼈던지 몇 자씩 적어놓은 일상에는 동글동글하게 어머니 필체도 무르익어 갔다.

내 글씨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지 예전만 못하다. 단상을 적는다고 노트에 글을 쓰다 보면 정갈하게 시작한 내 필체가 점점 악필이 되어갈 때면 한 자 한 자 온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쓰시던 어머니 모습을 떠올려본다. 한 땀 한 담 정성을 담던 어머니의 글씨야말로 세상에서 위대한 명필 중 명필이다는 생각이 든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 했던가, 총명한 기억보다 둔 필의 기록이 낫다는 말처럼, 어머니가 쓴 손편지에는 질곡의 땀과 눈물이 아로새겨 있다. 남루한 듯하나 위대하신 어머니의 손편지, 삐뚤빼뚤 글을 쓰시던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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