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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초록이 앞산을 푸르게 물들일 때면 아카시아 꽃향기 날아와 코끝을 간지럽히고 산 넘어 뻐꾸기 소리가 아득히 들린다. 이맘때 들리는 뻐꾸기 소리에 부모님의 모내기하시던 풍경이 떠오르고, 언덕 넘어 하얗게 피던 감자꽃이 그립다. 문명의 이기 때문일까, 산등성이만 남기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니 산비둘기 소리도, 꿩 우는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오늘따라 뻐꾸기 울음소리는 더 구슬프고 애절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듯이 우리 집 정원처럼 가까이 있던 앞산이 사라지다니 우공이산이란 말인가? 상수리나무를 타고 놀던 청설모와 눈이 마주칠 때면 기겁을 하고 달아나던 어린 동물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계절 내내 풍광 좋은 이 집에서 산 세월이 어느덧 삼십여 년, 그사이 나는 황혼이 되었고 집도 노옥이 되어간다.

중학생 시절에 이 집에서 산 두 딸이 지금은 출가하여 불혹이다. 그토록 싱그럽던 숲에 회색빛만 가득하니 삭막하기만 하다. 어쩌면 세월의 때만 낀 채 쇠락해 가는 집과 내 몸에 깃든 세월이 서글프다. 변해버린 산세에 딸들이 노년을 보낼 집을 사야겠다며 이사 가자고 권했다. 나도 언젠가는 정든 이 집을 떠나 작은 아파트에 가서 노후를 보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갑자기 이사라니 뒤숭숭하다. 이제는 내 주장보다 딸들의 의사를 따르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다. 두 딸이 어미의 보금자리를 선물하겠다고 회유하니 고마움에 이사를 결정했다. 철 따라 보여주던 산과 숲의 신비한 향연이 벌써 그리워진다. 어디로 가야는 걸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하늘에 너희의 처소를 예비한다 했는데 노욕을 버리자. 이런 때 남편이 살아 있다면 하는 별별 생각에 밤새 잠을 설쳤다. 내 생애 네 번째 장막을 옮기며 집을 마련하느라 애태웠던 지나온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1985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안양에서 신혼집을 팔아 서울로 입성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집값이 한창 오르던 때다. 내 퇴직금까지 다 긁어모아 총신대 근처 오래된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다. 짐 정리를 하고 일주일쯤 되자 주인이 집을 매매로 내놨다며 사람들이 집을 보러 왔다. 계약을 어긴 주인은 너무나 당당했다. 남편과 함께 가진 자의 만용이라며 서러워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궁리 끝에 집을 사겠다고 연락하니 한 달의 시간을 주었다. 하는 수없이 일부는 남편 회사에서 대출을 받고 나머지는 시부모님께 도와 달라고 편지를 썼다. 구구절절 서러운 마음을 시아버님께 글로 써 보냈더니 시골에 계신 아버님이 당장 올라오셨다. 허리춤에서 무명보자기로 싼 전대를 풀어 놓자 구릿한 돈 냄새가 났다. 장판 밑에 감춰 두었었다는 돈다발에는 아버님의 땀과 눈물과 온갖 풍상이 들어 있어 보였다. 자식이 뭐라고 머나먼 길을 달려오셨을까,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자식이 당한 어려움에 선뜻 돈을 지고 오신 아버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억척스럽게 담배 농사를 지으시며 여름내 건조실 앞에서 밤을 지새우던 아버님, 늙으신 몸에 까맣게 탄 시아버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가슴이 아렸다. 당신의 삶보다 자식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희생하시던 부모님의 공로로 우리가 오늘의 행복을 누리는 게 아닌가.

막상 정든 집을 떠나려니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듯 마음이 착잡하다. 미리 짐을 정리하는데 케케묵은 살림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꾸역꾸역 끄집어낸 물건마다 지나온 삶의 궤적들이 시절의 애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식 같던 장 항아리도 나를 보며 같이 가자고 하는 듯하다. 몇 번이나 정을 떼며 물건을 버릴까 말까를 반복하는데 나이 먹을수록 살림살이를 간단하게 하고 살라는 친구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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