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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이 고운 빛은 어디서 왔을까. 노란 도화지를 펼쳐놓은 듯 들녘이 황홀하다. 형용할 수 없는 가을빛을 따라 고즈넉한 길을 걷는다. 다 익은 벼 이삭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걸까, 바람이 출렁일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들린다. 내 마음도 덩달아 이리저리 흔들린다. 논두렁의 콩잎도 말간 노을빛같이 물들어가는데 며느리배꼽 풀 덩굴이 벼 이삭을 휘감고 뻗어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며느리 배꼽 풀이 반갑기 그지없다. 상념에 잠겨 덤불에 붙어있는 잎새를 만지작거려 본다. 보드랍고 연하다. 가느다란 덩굴줄기에 자잘하게 가시가 있다. 파란 꽃받침 안에 옹기종기 익어가는 아기 구슬이 청보석처럼 아름답다. 배꼽 풀이 나를 알은체하며 바짓자락에 달라붙는다. 하필 며느리 배꼽이라니, 새댁의 배꼽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말인가, 익살스러운 이름에 미소를 짓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풀을 달래며 떼 내려 하자 깨알만 한 가시가 찔끔거렸다. 시쿰한 풀을 따 먹던 고향의 들판이 눈에 선하다. 마을 앞 봇도랑에, 논의 가장자리에. 소 깔 베어 오시던 아버지의 지게 짐에도 배꼽 풀이 늘어져 있었다. 참 반갑고도 정겨운 마음이다.

학교까지는 신작로를 따라가다가 작은 개울을 건너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어느 날, 넷째 오빠가 학교 가는 길에 조금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며 가르쳐 주었다. 지름길 이래야 논을 가로질러 가는 논둑이다. 다 여문 벼 이삭들이 바람에 풋내를 풍기며 고개 숙인 채 일렁거린다. 그날따라 당번인 나는 혼자 가는 하굣길이 지루한데 마침 오빠가 가르쳐준 지름길이 생각났다. 들판에는 나락 익는 소리가 운율처럼 흐른다. 지름길이라는

논두렁에 들어서니 내 키만 한 나락 들 때문에 길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늘어진 벼 사이를 어떻게 뚫고 가야 할지 막막하다. 평소 다니던 길보다 훨씬 멀게 보이니 황당하기만 했다. 애타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허수아비는 벼 이삭의 물결 따라 춤을 춘다. 좁다란 논두렁에 너울진 콩잎들이 밟힌 흔적이 많다. 더구나 많은 사람의 숨은 발자국들로 땅은 반들거렸다. 누구 발자국일까, 오빠 발자국도 있겠지… 아직 어린 나는 벼 이삭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고 고추잠자리와 메뚜기들의 군무만 들판을 수놓아 간다.

산들바람이 한바탕 나락을 간지럽히고 지나간다. 콩과 벼들이 늘어진 논길을

헤집고 걷는데 며느리배꼽 풀이 길을 막아선다. 가로막는 배꼽 풀을 간신히 따돌려보건만 나한테 붙어서 꿈쩍 않는다. 어서 이 길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 것을… 논길은 지름길이 아닌 그야말로 협곡처럼 느껴졌다. 배꼽 풀과 씨름을 하며 간신히 벼 이삭을 헤집고 논길을 빠져나왔다. 옷에 붙어있는 잎사귀를 떼며 한숨을 돌리는데 바로 앞에 노인 한 분이 뒷짐을 짓고 서서 계셨다. "내가 오늘은 어느 놈이 논으로 다니는지 붙잡으려고 기다리는 중이다." 하신다. 화가 난 노인은 이삭이 다 떨어지고 콩이 밟혀서 손해가 막심하다며 네 아버지의 이름을 대라고 하신다. 역정을 내시며 변상시킬 거라는 말에 와락 겁이 났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 함자를 말씀드리니 아버지를 봐서 용서해 준다며 길을 가라고 했다.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저녁 내내 식구들 눈치만 살피는데 어머니가 그 일을 어떻게 아셨는지 크게 야단치시며 화를 냈다. 아버지는 노인의 집을 찾아가 사과를 하셨다고 한다.

하찮아 보이는 잡초지만 나를 가로막던 며느리배꼽 풀의 말 없는 충고는 내 삶의 교훈이 되었다. 씁쓰레한 어린 시절의 며느리배꼽 풀은 반칙이 아닌 원칙의 길로 가라는 묵시처럼 때로 길을 막곤 했다. 며느리배꼽 풀이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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