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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4.01 14:17:37
  • 최종수정2024.04.01 14:17:37

임영택

송면초등학교 교장·동요작곡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초가집이었던 우리 집 안방 윗목에는 겨울이면 꼭 두 가지가 생긴다. 수수깡을 새끼로 촘촘하게 엮어 만든 고구마를 보관했던 통가리와 다라이라고 불렀던 큰 대야 위에 Y자 모양의 받침대를 얹어놓고 그 위에 콩이 담긴 시루를 놓아두는 것이다.

부모님과 5남매가 한 가족을 이루었던 우리 집은 한 명은 꼭 안방 윗목에서 잠을 자야 했다. 우리 5남매는 서로 안방 윗목을 차지하기 위해서 사소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는데 항상 윗목 차지는 나였다. 딱히 부모님이 시켜서 그리 한 것은 아니었다. 뭔가 아지트 같이 막힌 공간이 아늑하고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안방 윗목을 차지한다는 것은 곰쥐처럼 고구마 통가리에서 고구마를 하나씩 빼먹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었지만 콩나물시루에 하루 세 번 빠뜨리지 않고 물을 주는 책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때는 몰랐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다 빠져버리는 시루에서 어떻게 콩나물이 자랄 수 있는지를. 대신 시루 구멍으로 쪼르륵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재미가 더 컸었다. 얼마간 물을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시루에 덮어 놓은 천이 불룩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자란 노란 콩나물은 그날 저녁 맛있는 콩나물무침으로 밥상 위에 올라왔다. 어머니께서 해 주시던 콩나물무침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칫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일이 쓸모없는 헛일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다. 하지만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고 다 흘러 내려간 줄 알았는데 그 안에서 콩은 싹을 틔우고 날마다 조금씩 자랐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교사로서의 삶과 견줘본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다.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일과 꼭 닮았다는 것을 말이다. 보이지는 않아도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물을 흡수하여 콩나물로 자란 시루 속 모습처럼 우리 교실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수업 내용을 귀담아듣지 않고 수업 태도가 바르지 못한 아이들을 보면 속상하고 때론 화도 날 것이며 열정을 다해 가르쳤건만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다 까먹고 '몰라요.'를 내뱉는 아이들을 보면 깊은 한숨에 기운이 빠지기도 했겠다.

아이들이 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 안에서 조금씩 성장의 양분을 저장하고 있음을 믿는다. 단 한 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시루 안에서 콩나물이 쑥쑥 자라나듯 우리 아이들도 날마다 성장해 가고 있음을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착각이다.

배움은 아이들에게 희망이다. 친구 관계가 무너지거나 삶의 태도가 바뀐다 해도 끊임없이 배움의 공간 안에 있으면 아이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교사가 먼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아이는 절대로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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