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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충북여중 교장

학창 시절, 시골에 살면서 기차로 통학하던 때가 있었다. 규모가 큰 역은 아니었다. 주로 시멘트를 실은 화물열차가 길게 늘어진 짐칸을 달고 다녔고, 승객용 기차는 소박한 통일호였다. 탈 때마다 자주 찾았던 자리는 맨 뒤쪽 다른 객차가 연결되지 않아 시야가 훤했던 곳이었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출입문을 잠그지도 않았으므로 더운 계절이면 시원한 바람으로 인기있는 곳이기도 했다. 몇 정거장을 오가는 동안 그곳에 서서 밖을 바라보는 시간은, 특별한 장면은 드물었어도 새로웠다.

기차 뒤쪽에서 바라보면, 풍경은 달리는 속도만큼 멀어지는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것이 자리를 채운다. 새로운 풍경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치며 이내 멀어지다가 찻길이 굽어지기라도 하면 가뭇없이 사라지고 만다. 기차 바퀴가 만드는 규칙적인 리듬에 따라 차곡차곡 진행되어가는 그러한 광경에 한눈을 팔다 보면 어느새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곤 했다. 그런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던 어떤 장면은 마음 어딘가에 저장된 듯 남아 문득문득 되살아나기도 했다. 반복되는 일상의 기억처럼 눈에 들어왔다가 자취가 사라지는 것들과 달리, 뭔가 강렬함이 있는 장면들은 생각의 수면 아래로 스며들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불쑥 눈앞에 마치 현재인 양 재생되며 마음을 채우는 풍경으로 변모한다. 기차의 맨 앞에서 만나는 광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이지 않았으되 달리는 속도만큼 다가오며 차츰차츰 선명해지다가 이내 지나치는 장면들은 기억의 어둠 속으로 흩어지지만, 그중 또 얼마쯤은 저마다의 무게를 가지고 가라앉았다가 어느 순간 익숙한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기차에서 바라본 광경들 뿐이겠는가. 공원 화단이나 한적한 길옆 한꺼번에 피어난 작고 하얀 꽃들이 그렇고, 책갈피에서 누렇게 바랜 편지를 발견하여 천천히 펼칠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곡조의 노래가 잔잔히 울릴 때도 그렇다. 어느 거리를 지나다가 그곳에 단단히 묶어두기라도 한 듯 여태 부표처럼 남아있는 환하거나 아팠던 기억들, 언젠가 되돌아와 한두 번쯤 머물다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듯한 공간들 역시 그렇다. 갑자기 요란스레 쏟아지는 장대비를 만난다든가, 오래된 사진을 꺼내 볼 때와 같이 의도적으로 공을 들이지 않았으나 모르는 사이 마음속 주머니에 무엇인가 만져지는 날, 마음은 짙거나 옅은 풍경으로 채워지게 된다.

어떤 풍경이 마음을 채우는 시간은 늘 지금이다. 그러나 그 풍경을 구성하는 내용이며 색깔은 종종 그동안 쌓아두었던 마음 속 어느 저장고에서 나온다. 보내온 시간의 행로가 길어질수록 저장된 양은 많아지고 재생을 기다리는 목록은 늘어난다.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진 장면들이 부지기수되, 단단한 화석으로 변해 풍화되지 않고 기다리면서 다시금 표면으로 얼굴을 내밀 때를 기다리는 장면 또한 부지기수다. 저장고에서 기다리다가 어떤 상황에 꼭 맞는 장면이 스스로 떠올라 풍경을 만드는 시간은 잠시만으로 그치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를 꼬박 머물기도 한다. 드물게는 더 길게 이어지며 마음을 온통 풍경의 색으로 물들여놓기도 한다.

마음이 어떤 풍경에 잠기게 될지 미리 알아내기는 어렵다. 무심결에 흘려보내는 마중물에 의해 길어올려지는 무형의 무엇은 문득문득 불어오는 바람처럼 예상 못하는 사이에 다가온다. 쌓여가는 장면은 물론이고 풍경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선택할 여지는 별로 없는 셈이다. 다만, 마음을 일상 밖의 여행지로 끌어당기는 풍경이 펼쳐지는 때, 현재의 시간에 매여 굳어지고 빈약해진 상상력에 우화하는 나비의 날개처럼 혈액이 돌기 시작하는 때에는 잠시라도 그 풍경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팔월 말 정퇴와 명퇴로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들을 만나며 그분들 몫으로 저장된 풍경을 길어올리는 때는 그래서 소중하게 몰두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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