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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종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관장

얼마 전에 길을 지나다가 군고구마를 굽는 가게를 보았다. 그 가게에 설치 되어 있는 군고구마 굽는 기계는 예전과 같이 연탄불이나 장작을 이용해서 굽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이용해서 굽게끔 되어 있었다. 첨단화된 시설이라 깔끔하니 보기 좋았지만 군고구마와 깊은 인연이 있는 필자에게는 왠지 모를 섭섭함이 있었다. 군고구마는 나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필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 바로 군고구마다.

80년 7월 말, 한 여름 때에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지나서 나는 부모님에게 군대도 다녀왔으니 이제 집으로부터 나가서 생활을 하겠다고 독립선언을 하였다. 남자로서 가장 부담이 큰 국방의 의무를 마쳤으니 이제는 세상에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당시에는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제약이 많았다. 취직도 쉽지 않았거니와 여권 발행도 까다롭고 유학 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남자가 제대로 대우를 받으려면 군필이 최우선이었다. 집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나는 우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잠자리야 학교 앞 독서실 총무 자리를 미리 부탁 해놓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먹고 쓰는 생활비를 확보하는 것이 문제였다. 집에다가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어렵다고 해서 다시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차에 친구들 모임이 있는 자리에서 궁색한 하소연을 하면서 이참에 군고구마 장사라도 해야 할까보다 라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를 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친구 녀석들이 "네 주제에 무슨 군고구마가 장사를 하냐· 넌 절대로 못한다" 이런 소리들을 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그 다음날로 나는 당장 영등포 시장에 가서 군고구마 통을 사가지고 왔다. 녀석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군고구마통을 운반할 때 쓸 바퀴달린 끌차도 손수 만들었다. 운반비까지 총 제작비가 1만5천원 들었다. 당시 어려운 살림의 나에게 1만5천원은 거금이었다. 완성된 군고구마통을 독서실 밑 한 쪽 구석에 잘 챙겨놓고 동네 군고구마 장사 순례를 하였다. 군고구마를 한 번도 구원 본 적이 없는 나는 그 굽는 노하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존의 군고무마 장사 동료(·)들에게 노하우를 전수 받고 드디어 장사를 시작하는 날! 일찍부터 나는 용산시장(지금의 용산역 주변이 큰 시장이었다)에서 30kg 짜리 날고구마 한 박스를 사서 직접 짊어지고 흑석동까지 왔다. 그리고 시장에서 불 붙은 연탄(당시에는 불 붙은 연탄을 팔았다) 하나와 생연탄 하나를 사서 군고구마통에 넣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영업장소는 학교(흑석동 중앙대학교) 앞 파출소 건너편으로 정했다. 이유는 그래야만 학교 선후배들이 적선하는 샘치고 군고구마를 사줄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에서 였다. 오전에는 독서실 일도 봐줘야 해서 오후 서너시부터 영업을 시작하였지만 장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 용돈벌이로는 나쁘지 않았다. 군고구마 장사는 밤 11시 30분 정도까지 했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12시 지나서까지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남은 군고구마는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시는 동네 어른신들께 챙겨드렸다. 군고구마 덕분에 한겨울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군고구마 장사 이후 꽤 오랫동안 군고구마를 먹지 않았다. 손에 배인 군고구마 냄새는 비누로 씻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 냄새는 장사를 그만 두고 근 열흘은 지나서야 없어졌다. 그 당시 길 건너편에 작은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추운 몸과 마음을 녹여 주는 훈훈한 난로였다. 그 때 들은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지금도 12월만 되면 나는 군고구마 추억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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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