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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수필가

어둑해진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논밭은 고만고만하다. 게다가 작은 밭뙈기들이 서로 맞댄 경계는 구불구불하기까지 하다. 계단처럼 올라오는 다랑이논, 사이에 좁고 굽은 길, 그 위로 삐뚜룸히 앉은 비탈밭을 오르면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그 안에서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참나무는 참나무끼리 맨몸을 웅숭그리고 겨울을 견디는 중이다.

빈 들에 둥글고 하얀 것들이 눈을 이고 조르르 서 있다. 초록빛 봄을 지나, 가을의 풍요를 거둔 뒤에 하얗고 둥그런 동물의 먹거리가 남았다. 둘둘 말아 랩으로 감싸놓은 소들의 김장김치, 볏짚 사일리지다. 랩 포장을 벗기면, 잘 익은 김치처럼 새콤한 냄새가 난다. 누군가는 공룡알이라 하고, 누구는 공깃돌이라고도 부른다. 어떤 이들은 지나다 차를 세워두고 우르르 몰려가 흔들어 보았다고 했다. 너무 무거워 꿈쩍도 하지 않더란다.

흐르는 세월은 낭만의 모양마저 바꾸어 놓은 모양이다. 볏짚마저 자신을 꽁꽁 싸매 허투루 맨몸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된 듯하다. 옛날에는 추수가 끝난 논마다 집채만 한 볏짚 동가리가 서 있었다. 초가지붕처럼 뾰족한 꼭대기로 올라가 미끄럼도 타고, 아래 건물처럼 세워져 있던 볏단 몇 개를 들어내고 그 안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볏단 속의 그 아늑함은 겨울바람이 세찰수록 진가를 발휘했다. 볏짚은 본디 따뜻한 물성을 지녔다. 요즘처럼 기온이 곤두박질치는 날에는 송아지 축사 바닥에 볏짚을 더 넉넉히 깔아 준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송아지들이 용케도 푹신한 곳을 찾아 옹기종기 눕는다. 아무리 비닐로 꽁꽁 싸매 놓아도 제 본성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직장을 다니던 큰아들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다. 첫 근무지는 집에서 가까워 두 해를 함께 살던 차, 아들로부터 독립을 무시로 외쳤던 나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법륜스님을 비롯한 여러 현명한 이들이 말하기를, 아이들은 돈을 벌든 못 벌든 나이 스물이 넘으면 무조건 내보내 살게 해야 한단다. 그것이 둘 다 감정에 상처받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공감했던 터라, 다음날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고 와, 기쁜 마음으로 아들의 살림살이를 싸기 시작했다.

제 입던 옷가지와 이불 한 채, 주방 살림 몇 가지면 될 줄 알았는데, 사람이 살려면 참 소소한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혹여, 구기적거리는 셔츠를 그냥 입은 채 다닐까 싶어, 다리미를 챙기다 말고, 노트에 셔츠 다리는 순서를 적어 두었다. 또, 무신경한 아들이 양말 짝을 잘 찾지 못하고 짝짝이 양말을 신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같은 디자인의 검은 양말만 여러 켤레 모아 넣었다. 양말목이 늘어나지 않게 양말 개는 방법도 그림으로 그렸다. 밥공기, 접시, 냄비등을 챙기며 프라이팬의 기름기 설겆이를 깨끗하고 쉽게 하는 법도 적어 두었다.

지난 일요일 아들의 살림살이를 옮겨 주고 내려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마음이 바빴는지 나름 '살림비법'을 적은 메모를 깜빡 잊고 보내질 못했다. 살면서 경험으로 터득하면 될 일을 잔소리처럼 하는 게 아닌가하고 잠깐 망설였지만, 제 필요할 때, 확대해 보면 요긴할 것 같아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다. 그동안 외지에서 학교 다닐 때, 살림살이를 여러 번 싸 보냈어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집을 떠났으니 제 짝을 만나게 될 테고, 이제 내가 제 생활에 참견할 시간이 더는 없을 것 같다. 막상, 분가시키게 되어 정말 기쁘다고 큰소리는 쳤어도, 홀가분하면서 서운하기도 하고, 기대를 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좀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종일 주인이 떠난 방을 정리했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내내 전화기를 흘끔거렸다.

저녁 무렵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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