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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수필가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나 지금 결혼 안식년을 떠나요. ···'

문정희 시인은 '공항에서 쓸 편지'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다.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 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 ···내 말이 그 말이다. '사막인지 오아시스인지 아무튼 그 안에다 잔뿌리를 내리고, 가지들도 무성히 키웠으니.' 이제 일 년만 나를 찾지 말라고 편지 한 장 써서 부치고 훌훌 훨훨 떠나고 싶었다.

6년 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었던 터라, 시인처럼 일 년까지는 아니어도 이 봄 한 계절만큼은 여행지에서 보내고자 야무지게 세웠던 계획이 실현 불가능해졌다. 갑작스럽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는 바람에 여행은 고사하고 도서관도 문을 닫고, 체육관, 수목원 등, 어디도 편하지 않다. 원치 않는 집콕을 하면서 소화도 안 되고, 자고 나면 늘어나는 감염자 소식은 편두통을 불러왔다.

이래저래 시장 보는 일도 줄어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비우기 시작했다. 장을 봐오면 다 못 먹고 냉장고 살을 찌웠던 터라 어렵지 않을 듯했다. 제일 먼저 냉동실 맨 앞에서 발등을 찧는 흉기로 변해버린 검은 봉지 속 떡 뭉치를 녹여 팬에 깔고 치즈를 얹어 점심 한 끼를 때웠다.

저녁때는 맛집 소개 프로에서 본 '도리뱅뱅이'를 만들어 보겠다고 사다 놓고선 의욕이 식어버려 냉동실 서랍에 넣어둔 캐나다산 열빙어 한 봉지를 꺼내 녹였다. 다른 음식에 밀려 좀처럼 나올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란히 담아 에어프라이어에 구우니, 뱃속 가득 들어찬 알들이 고소하게 씹히는 것이 이른 저녁 맥주 안주로 맞춤이었다. 묵은 숙제를 해치우듯 기분 좋게 클리어!

얼린 생선들을 먹어 치우고, 냉동만두를 꺼내 튀겨먹고, 지난 설 때 넣어뒀을 전과 부침개도 데워먹고 나니, 냉장고 안이 조금씩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언제 넣어둔 건지 모를 죽기 직전의 채소들을 모아 숭숭 썰어 듣도 보도 못했다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으니, 체증에 걸린 냉장고는 조금씩 숨통이 트이지 덜덜거리는 소리가 줄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풀다가 콩을 쏟았다. 무얼 할까 생각하기도 전에 개수대 물에 빠져 버렸다. 찬물 위로 둥둥 떠 있는 쭉정이들과 썩은 콩을 골라내면서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졌다. 내 엄마 같으면 당연히 삶아 청국장을 띄우겠지만, 난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마땅히 청국장 균이 좋아할 40도를 유지할 아랫목도 없거니와, 쿰쿰한 냄새를 견딜 만큼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기도 했다.

누런 애물단지는 이틀째 물속에서 몸집을 불리더니 하얀 거품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걸 처리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박박 씻어 큰 들통에 넣어 삶았다. 삶아 껍질 벗긴 콩을 봉지 봉지 담아 이웃들에게 돌리고 나니 마음속에 돌덩이 하나 덜어낸 듯 속이 시원했다. 답례로 흙이 더덕더덕 묻어 사방팔방 뿌리를 뻗고 있는 도라지를 한 봉지 얻어왔다. 냉장고가 다 비워지면 호미 들고 논둑 밭둑 날아다니며 냉이 캐서 된장국 끓이고, 나물 뜯어 무쳐 먹을 생각이다.

해마다 옮겨심어 육 년을 길렀다는 약도라지를 손톱이 까매지도록 까고 있으려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관자놀이를 찍어대던 두통이 뜸해진 걸 보니, 냉장고를 비운 건지 마음을 비운 건지 무언가 비우기는 한 모양이다. '코로나'는 여전히 감염자 수를 늘리고 있고, 껍질을 까야 할 도라지는 바가지에 수북하다. 기다리다 보면 조만간 공항에서 홀가분한 맘으로 편지를 쓸 날이 오겠지. "여보 날 찾지 말아 주세요. 냉장고 문에 조리법 몇 가지 적어 놨어요, 당신이 날 찾지 않게 되는 날, 그때 돌아올게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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