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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수필가

부스스 일어나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앉았다. 남은 아침잠을 털어내기도 전에 남편이 주먹을 내민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진 사람이 커피를 탄다. 가끔 이길 때도, 종종 질 때도 있지만, 남편이 무신경하게 제조한 커피 두 잔을 들고 오는 날이 더 많다.

커피를 타는 방식은 상대의 커피 취향은 상관없이 자기 본위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건, 서로 만들어주는 커피에 대해서는 불평 없이 마시기다. 남편은 늘 알갱이 커피 한 스푼에 더운물 붓고 꿀 한번 쭈욱 짜 넣어 휘휘 저어 들고 와 한잔을 내민다. 꿀맛이다. 아니, 진짜 꿀맛이다. 어디서 들었는지 여의도에서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아침에 꿀 커피를 그리 많이 마신다면서 나름 꿀 커피 제조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내가 커피를 탈 때는 캡슐커피 머신을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N사의 보라색 캡슐, 이름도 그럴듯한 '아르페지오'다. 캡슐이 '폭'하고 뚫리면서 '쪼로로록' 작은 잔을 채우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크림색 크레마와 밤새 내려앉은 공기를 휘감는 향기는 더없이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라는 '남이 타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겠다고 아침마다 가위바위보에 목숨을 건다.

가위바위보에 지고, 삼판 이승, 오판 삼승에서도 지고 눈이 안 떠진다며 뭉그적거리는 사이 남편이 주방으로 향한다. 헐렁한 반바지 아래 가늘어진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청춘일것 같던 남편의 상처투성이 가는 다리와 휑해진 뒤통수에 마음이 머문다. 어느 하루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날들을 살아온 그다.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는 일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기를 돌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동물들은 원하는 걸 말할 수 없고, 싫은 것을 싫다고 전할 수 없으니, 기본적인 먹을 것 외에는 오직 주인의 감수성에 맡겨야 한다. 그러니 섬세한 남편에게 일은 더욱더 끝이 없다. 일 속에 묻혀 사는 게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왜 모르겠는가, 본인의 꿈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오랜 세월 달려왔다는 사실을···,

나는 나대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빨리 자라주길 바랐다. 갓난아기 때는 어서 기저귀를 떼기를 바랐고, 기어 다닐 때는 걷기를 바랐다. 학교에 지각할까 김에 둘둘 만 밥그릇을 들고 차에서 먹여가며 학교로 실어 날랐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은 제 일을 찾아 나가고 이제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아 집을 지키고 있다. 몇 번이고 소리 높여 아침잠을 깨워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침이든 저녁이든 늘 조용하다.

거울을 보듯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함께 늙어가는 일은, 기꺼이 살아내야 하는 삶에 꿀을 섞어 커피의 쓴맛을 감추는 일이기도, 단맛 속의 쓴맛을 찾아 기꺼이 음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삼십 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부부는 많은 말을 않고도 그리 큰 불편함을 모른다. 하지만, 아침의 고요함은 가끔 낯설다. 언젠가 이 고요함이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가위바위보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즘 남편이 타주는 꿀 커피 맛이 조금 달라졌다. 조금 텁텁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의 잡내도 나는 듯하다. 기분 탓인가 싶었지만, 휴지통을 비우다 사놓고선 식탁 한쪽에서 뒹굴고만 있던 콜라겐 가루 빈 봉지를 발견했다. 나이 들어가는 아내에 대한 측은지심인지,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이 아까운 마음에서 커피잔에 털어 넣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짐짓 모른 체 엄지를 치켜세우며 남편이 건네는 꿀 커피를 달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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