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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수필가

조팝꽃 하얀 무더기 옆에 분홍 진달래, 그 뒤에 노란 개나리가 한꺼번에 피어 있는 그 짧은 봄의 어디쯤에서 여자는 결혼을 결심했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파스텔 그림처럼 펼쳐지던 연두색 산을 보면서 마음을 굳혔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즈막히 엎드린 연두 산에는 군데군데 분홍이거나, 노랗거나 하얀색 봄들이 들어앉아 소곤대고 있었다.

남자의 치밀한 계획이었는지, 차창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취한 과잉된 감정 이입 덕분인지, 철없는 여자는 산이 이쁘고 동네도 이쁘다는 이유로 이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거창하거나 화려한 프러포즈를 받은 것도 아니다. 서너 번의 심심한 데이트를 했을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배려하는 태도가 단정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한 여자와는 다르게 맏이처럼 듬직했다. 결혼하기 딱 좋은 남자였다.

결혼하고 보니 봄인줄 알았던 남자는 여름이었다. 그것도 한여름 활활 타는 삼복이었다. 여자는 짧은 봄을 스쳐 보내고, 삼복더위 같은 남자와 용암 같은 아이들과 정신없이 지냈다. 찌는듯한 더위와 지난한 장마를 얼마나 겪어냈는지는 헤아려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큰아이는 제 밥벌이를 하느라 얼굴 한번 보여주기 어려울 만큼 바쁘다 하고, 작은 아이마저 제 꿈을 찾아보겠다고 외국으로 나가려고 한다.

인생을 사계로 나눈다면, 지금 여자의 계절은 가을의 어디쯤일까, 여름을 정신없이 살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다. 가끔 소나기도 내리고 때때로 태풍도 불었지만, 그만하면 열심히 살았고, 삶의 충일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날들이었다고 생각했다. 짧은 봄과 긴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건 당연한 섭리. 하지만 여자는 본인도 모르게 스쳐 지나간 봄이 늘 아쉽다. 봄보다 먼저 봄을 맞이하겠다고 고개를 '쭝' 빼고 봄을 기다렸다.

여자는 옛 시 한 구절을 무심히 읽었다.

'종일토록 청려장 지팡이를 짚고 봄을 찾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매화나무 끝에 봄이 와 있었다'는 옛 시이다. 새로울 것도, 신선하달 것도 없는 그 이미지가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열이 오르내리는 남자의 침대 옆에서 여자는 두쿵 깨우쳤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호한 계절의 경계 속에 여름 안에 봄이 있고, 봄 안에 겨울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봄은 아직도 여자 옆에서 따뜻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지나간 모든 날이 봄날이기도 했다는 것을 여자는 뒤늦게 알았다.

여름처럼 뜨겁다 느낀 남자의 성격은 삶에 대한 열정이었고, 가진 것 없는 젊은 가장의 책임감이었음을 알았다. 하여, 여자와 아이들의 봄이 되고자 치열한 여름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여름이 지나고 가을과 겨울이 온다 해도 남자는 여전히 뜨거운 여름을 살리라는 것을, 여자는 가을 아침의 서리 같은 하얀 머리칼을 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 여자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차창으로 지나는 희고 노란꽃이 가득한 봄 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본 고불길 가장자리에서 찬란하던 봄꽃들은 여자의 마음속에 피어 있었다. 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날 '세븐다방'에서 남자의 순한 눈과 마주친 짧은 순간,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었다. 여자는 이미 그 겨울부터 봄을 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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