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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우

청주 단재초 교사

경복궁 향원정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아버지가, 큰형 환갑 때 뭔가 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작은형과 동생에게 그 뜻을 전했다. 잠시 백수 중인 작은형이 기대 이상의 돈을 냈다. 여행상품권도 마련하고, 랍스터와 킹크랩을 터지도록 먹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들려줄 손편지를 나에게 맡기셨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줄 법한 내용을 떠올려 보면 되잖아. 너도 두 아들을 키웠으니, 4형제를 키운 내 마음을 다른 놈보다는 더 짐작할 수 있지 않냐? 쓰고나서 직접 검사받을 필요도 없다. 네가 낭독할 때 누군가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합격이다." 교사로 생활하면서 학생에게 이렇게 어려운 숙제를 낸 적이 있었던가?

서울 중계동에 도착했다. 예약한 자리에 붙일 현수막은 큰형의 아들, 하석이가 일찌감치 마련했다. 케이크는 큰형의 큰딸, 은선이가 준비하기로 했다. 꽃은 아무도 준비하지 않는 모양이다. 카카오맵으로 근처 꽃집을 찾았다. 친형의 환갑에 줄 꽃이라고 주문하니 맞춤형으로 잘해주었다. 리본 띠에 인쇄할 문구를 불러달라고 해서 "사랑하는 큰아들아!"라고 말했다. 내 얼굴을 다시 보던 여주인의 얼굴이 갸우뚱거렸다.

작은아버지가 1분 동안 개식사를 하고, 하석이는 현수막의 글귀를 읽어나갔다. 방문이 열리고 은선이가 멋진 케이크에 초 여섯 개의 불을 밝힌 채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생일 노래가 불리었다. 촛불이 계속 끄먹거리고 있을 때 동생이 상품권을 전달했다. 이젠 내 차례다. 큰형에게 들려줄 편지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제수씨가 들국화의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음악을 틀었다.

"오늘 이 자리에 누가 왔는가? 모두 반가운 얼굴이구나! 은선이의 재롱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하석이가 어미 배 속에서 나를 배웅할 때, 난희가 무거운 배를 안고 올랐던 대룡산 근처 비탈길을 내 어찌 잊을까! 모두 보고 싶었고, 음(陰)으로나마 너희를 돕고 싶었다." 여기까지는 부드럽게 읽어나갔다. 다음부터가 고비다.

"우인아, 내 큰아들 우인아! " 큰형 이름을 부르고 나서 다음 문장을 읽어야 하는데 숨을 고르지 않고 읽었다가는 눈물 한 방울이 나올 것 같았다. 오직 이 한 문장을 읽어주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감정에 휩싸이면 불합격이다. 몇 초인지 모를 시간 동안 들국화의 노래만이 이 조용한 공간에 퍼졌다. '그래,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읽어라, 성우야!'

"고맙다. 나보다 오래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 그래서 내 환갑보다 더 기쁘다." 형의 환갑이지만 아버지는 형수에게 하고 싶은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난희야, 내 큰 아가야! 사돈어른이 네게 올려준 생일상보다 네가 올려준 제삿밥이 더 많았구나. 내 주위 인간들이 어찌나 부러워하는지 흠향하기 부끄러웠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머지 부분부터는 목소리가 커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다음날에 영상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두 단어를 잘못 읽어서 더 부끄러웠다.

동생 딸, 여섯 살 은비가 들고 있는 꽃다발 안에 편지를 넣었다. 웃으며 조카를 맞이하던 큰형의 얼굴색이 갑자기 붉어졌다. 리본 글 탓일까? 모두 다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큰형은 막내 조카와 함께 끄먹거리는 불을 껐다.

모든 긴장이 사라졌다. 랍스터와 킹크랩으로 채우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평소 주량의 반도 못 채웠다. 식당을 나오며 큰형과 작은형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심야버스를 타고라도 청주로 가고 싶었다. 작은형이 남부터미널까지 배웅해주고 웃으며 한 말이다. "야, 너 때문에 처음으로 술을 먹지도 않고 울었잖아!"

새벽에 도착하였다. 빨리 잠을 청했다. 환갑 전, 검은 미소의 '향원정 사진' 속에만 계시는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합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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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