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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혜경

봄꽃의 수런거림이 심상치 않다. 하루 사이에 창밖 살구꽃이 와르르 펴버렸다. 볼그레한 빛깔에 취한 사람들의 셔터소리도 요란하다. 오늘은 작은 아이가 처음 제 이름으로 된 집을 사서 이사를 하는 날이다. 덩달아 신이 난 마음에 이불 보따리 하나라도 날라줄 양으로 전화를 했더니 포장 이사센터에서 순식간에 해준단다. 세상 참 편해졌다고 해야 할까. 예전처럼 보자기마다 양은솥을 싸고 이불 보따리를 끙끙거리며 끌어낼 필요가 없다.

젊은 날 나도 참으로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열댓 번 끌고 다니다 보니 모든 가구의 다리가 흔들거린다. 종이를 접어 대충 괴어 놓고 제 자리를 잡을 때쯤이면 영락없이 세를 올려 달라는 통지가 날아든다. 그러면 모든 보자기는 또 동원이 되고 삐걱거리는 가구들은 집 밖으로 끌려나온다. 서럽고 야속하기도 한 세월이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우리 통로 15층 사시던 부부도 새집을 사서 떠난단다.

사다리차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창문을 닫아걸고 화분을 살핀다. 겨울을 잘 견디고 화사하게 봄꽃을 피운 것도 있고 똑같이 정성을 들였음에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비실거리는 녀석도 있다. 이 녀석들도 이사를 할 때가 되었나보다. 화분이 작아서 뿌리가 들고 올라온 것도 있고 잎 끝이 시원찮은 것을 보면 뿌리 끝이 상한 녀석도 있는 것 같다. 내친 김에 분갈이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군자란, 동백, 아젤리아는 좀 더 큰 화분으로 집을 늘려 이사를 시키고 치자 화분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내 집에 온지 십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변변히 꽃을 피워 본 적이 없는 녀석이다. 치자 향내처럼 잎도 달콤한지 진드기를 비롯한 벌레들이 들끓어 손이 많이 갔지만 소담스럽게 꽃을 내놓은 적이 없으니 해마다 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게 만든다. 올해도 꽃봉오리가 대여섯 개 달리긴 하였지만 두서너 송이 피기도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월세를 제대로 내지 않고 버티는 세입자 같아 미운 생각도 든다. 튼튼하고 꽃도 많이 피우는 다른 품종으로 갈아 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종삽으로 툭툭 화분을 두드려 치자를 뽑아내려는데 오래전 집을 비우라고 찾아와 문을 두드리던 집주인의 우악스런 주먹이 떠올랐다. 며칠 더 버텨보려고 집안에 숨어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있으면 홧김에 대문에 발길질을 한번 하고 돌아서는 주인아저씨의 구둣소리,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무서웠던 방 빼라는 소리, 우리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집주인이 그 때는 하나님 같았다.

치자나무도 지금 내가 하나님 같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툭툭 화분을 두드리는 소리가 우악스럽게 대문을 두드리던 방 빼라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내 손에 꽃나무들의 생사여탈권이 쥐어져 있으니 하나님 같지 않았을까. 좀 더 예쁜 화분에 옮겨 심고 봄날 한켠을 나누워 준다.

가진 것 없는 내가 모처럼 나보다 더 가진 것 없는 약한 것들 앞에서 하나님 놀이를 하고 있나보다. 배고프고 서럽던 시절에 이불 보따리를 이고 허름한 집들을 찾아 전전하던 그 설음을 그새 잊었던 모양이다. 작은 용달차에서 덜그럭거리며 보자기 밖으로 삐져나오던 양은 냄비를 다시 꼭꼭 여미던 그 살뜰함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삐거덕거리는 장롱다리를 괴어 맞추며 다음에는 내 집으로 이사를 가겠노라 다부지게 마음 다잡던 부지런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치자나무를 다시 화분에 넣고 흙을 갈아주며 살만큼 맘 놓고 살아보라고 너그러운 집주인 행세를 해본다.

창밖에는 행복한 봄날을 베어 문 새 사람의 짐 들어오는 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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