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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8.31 17:37:54
  • 최종수정2023.08.31 17:37:54

박영록

한국교통대 중국어전공교수

어떤 주장의 입론 방식에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slippery slope argument)이란 것이 있다. 어떤 물체를 미끄러운 경사길에 두면 주욱 미끄러져 결국은 가장 아래쪽에 닿게 마련인데, 이와 같이 어떤 주장 A는 결국 처음에 상상도 못했던 B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논리 전개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안락사'를 도입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자들은 아직 살릴 수 있는 사람도 안락사 당할 수 있다거나 나아가 신체적으로나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이 안락사에 내몰려 인명경시 풍조가 일어날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대규모 살상까지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비논리적이라고 비판 받는다. 첫째는 논의가 되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따진다는 점이다. 요컨대 '안락사'는 생명 존엄성의 정의, 생명의 자기결정성 등이 논점인데, 반대론자들은 그것을 허용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을 제시하고 있어 원래의 논점에서 벗어난다.

둘째는 새로운 대안의 발생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가령 안락사를 시행한다고 해도 멀쩡한 사람을 죽게 하지 않을 온갖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갖출 수 있다. 즉, 인류는 미끄러운 경사길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보호막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은 확실히 비논리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는데, 어떤 주장의 논리 구조가 비논리적인 것과 그것이 나쁜 주장인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같이 훌륭한 분들의 말을 인용하여 주장을 세우곤 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논리적으로는 '사람에의 논증'이라 하는 오류 논증일 뿐이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경전과 성인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조선이 망해가던 무렵에 심상교라는 선비가 있었다. 심상교는 일본의 조선 침탈에 속을 끓이다 당시 유림의 대표였던 면암 최익현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최익현에게 제발 자결하여 절의를 내보이라는 권유였다. 그러면서 본인은 자결 해 본들 알아 줄 사람도 없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으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사람에게 자살을 권하는 것이 도덕적일까· 인간이란 뜬금없이 이상한 신념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남들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시라고 권유하는 것이 "말이야 바른 말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안락사가 미끄러운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보호막대를 만든다고 해도 이런 사람의 입까지 막을 방법이 있을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제도를 시행하려 한다면 그 제도가 낳을 수 있는 문제점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올바른 태도이다.

사실 정책 대결에서 상대방 주장의 논리성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경제나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 인간의 논리대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에서도 비논리적이라는 비판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제시하는 개연성 있는 미래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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