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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윤

작가

“바둑 한 판에 6개월 두던 시절이 그립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조훈현 9단이 인터뷰를 통해 한 말이다. 어린 시절 10년 동안 일본에서 바둑을 공부한 그는 담담하게 그 시절의 바둑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가 스승 세고에 겐사쿠를 만난 인연부터, 스승이 자살하게 된 동기, 그리고 그 스승과 함께 죽은 강아지‘깽깽이’소식까지 바둑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선연히 되살아났다.

본가에 가면 50여년의 나이를 먹으며 낡아가는 책장이 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이 즐겨 읽던 책들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계시는데, 거기에는 70년대 나왔던 한자투성이 <위기명인기성전> 시리즈가 지금도 꽂혀 있다. 노르스름한 반상 위에 희고 검은 바둑돌의 그림과 그에 대한 해설은 어린 내게 감칠 맛 나는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했다.

<위기명인기성전>은 일본의 바둑기성전을 해마다 엮어낸 바둑기보였다. 고등학생이었던 형이 바둑에 빠져 해마다 출시되는 기성전시리즈를 모아놓았던 것이다. 일본의 3대 기전인 명인전, 본인방, 기성전 시리즈가 횟수별로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형은 기보를 통해 바둑공부에 여념이 없었지만, 난 바둑을 두기 전 풍경이나, 바둑에 얽힌 사람들의 소소한 에피소드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바둑을 통한 고수들의 인간적 풍모에 매료되었다고 할까.

조 9단은“시대에 따라 바둑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요즘은 바둑을 너무 승부로만 본다. 이기기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이는 과거의 바둑과는 너무나도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바둑은 분명 게임이고 스포츠다. 그러니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일본의 바둑은 예와 도를 기본으로 임한다. 그러면서 바둑은 철저하게 상대방과 싸움 혹은 경계를 통해 집을 많이 확보하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다. 공평하게 서로 한 수씩 나눠두고, 시간도 똑같이 배분을 받는다. 널따란 바둑판은 온전한 땅이다. 처음에는 그 땅을 조금씩 서로 공평하게 나눠가면서 삶이 시작된다. 그러다 정해진 땅을 나눠가지면서 조금씩 탐욕이 싹트며 전쟁을 시작한다. 상대편의 땅에 침범하기도 하고, 미리 공격에 대비해 튼튼한 담을 쌓기도 한다. 때론 더 큰 땅을 얻기 위해 작은 땅은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렇듯 바둑으로 인생을 관조할 수 있었기에 바둑을 두는 풍경은 삶의 격조와 아취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요즘 바둑은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하는 인상을 준다. 일례로 지난 2019 하세배 결승경기에서 중국의 커제가 어이없는 자신의 실수로 바둑에서 패하자, 바둑돌을 바닥에 던져버리는 대국의 태도는 적이 실망스러웠다.

‘햇빛과 옅은 안개가 어우러진 아침 공기는 담백했다. 향긋한 차 한 잔을 머금는 순간, 돌의 거처가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손을 들어 돌을 살며시 내려놓을 때, 창밖 대숲 속에 머물던 바람도 슬쩍 방안을 건너와 손끝에 일순 머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햇빛과 어우러진 잔바람이 반상 위로 고요한 그림자를 던진다. 자연의 무심한 시선이 반상과 바둑 두는 이들을 어루만진다. 도전자 오오다케 9단이 미학을 중시하는 기풍이라면, 사카다 9단은 그야말로 면도날이라는 별명답게 날카롭다. 사카다는 오오다케의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집을 정교하게 흠집을 내면서 파괴하리라. 오늘 기성전이 열리기 전날, 사카다는 늦은 밤까지 이 마을의 전통주 사케를 마신 탓인지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그에 비해 오오다케 9단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여름의 열기를 물리치려는 듯 부채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마침내 흑을 잡은 오오다케 9단이 바둑판에 바둑알을 올려놓았다. 마치 고요 속에 담갔다 뺀 손끝으로 놓은 듯 청량한 소리가 대기를 헹구었다.’

당시 기성전이 열리던 방안의 풍경이 그림처럼 마음에 펼쳐진다. 이제 바둑을 통해 선인(仙人)들이 지상의 삶을 연출하던 광경을 기대한다는 것은 정녕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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