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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단양 영춘초등학교

1906년 6월 홍명학교로 개교… 1996년 영춘초로 개칭
단양 최초로 엄과섭 교장이 한국인들의 배움 위해 설립
1989년 영춘교·북벽교 세워지기 전 나룻배 통학 등 담기 연혁지 보물로 간직

  • 웹출고시간2015.07.16 15:47:42
  • 최종수정2015.08.17 14:54:22

1906년 개교한 단양 영춘초는 지금도 지역 인재양성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영춘초 전경

[충북일보=단양] 수많은 시대의 변화속에서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긴 세월동안 발전을 거듭해온 단양 영춘초(교장 정천택).

지난 1906년 6월 홍명학교로 개교한 영춘초는 1912년 영춘공립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96년 영춘초로 개칭해 현재까지 5천여명의 졸업생을 사회 각 분야에 배출, 인재를 양성해 왔다.

개교당시 영춘초 학생들은 학교에서 닭을 기르고 채소를 가꾸고, 토끼를 기르며 돼지를 사육하는 등 학생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교사의 회초리가 무서워 일본말을 익히며 종아리에 피멍이 들어도 집에 가서 하소연 한번 하지 못했던 일제시대의 영춘초는 무서움과 공포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래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떨쳐내지 못하고 아침에 되면 학교로 발걸음을 향하던 당시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이었다.

영춘초 개교 100주년 기념비

영춘초는 옛 영춘 현청의 교육기관, 영춘군의 최고학부라는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다.

단양에서는 처음으로 엄과섭 교장이 한국인들의 배움을 위해 설립하면서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학교 개교당시부터 현재까지 학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연혁지는 지금도 영춘초등학교의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영춘초는 1906년 화재로 인해 학교 건물이 모두 불에 타 공아장청으로 이전했고 1907년 정미병란으로 학교가 불타 휴교를 하기도 했다. 이후 1908년 아의루에서 다시 학교를 개교했고, 1950년 6.25로 휴교를 한데이어 1951년 중공군 개입으로 교사가 모두 불에 타 비품이나 서류 등이 모두 소실돼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은 지금도 살아있다.

1922년 영춘초 10회 졸업생인 유덕산 동문의 졸업증과 수업증서가 지금까지 발견된 영춘초의 역사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분의 자녀인 유학렬씨가 보관해 오고 있다. 유학렬씨가 1941년 학교에서 받은 상장에는 창씨 개명된 이름이 사용됐다.

나룻배 통학모습

1989년까지 영춘교와 북벽교가 세워지기 전 두곳에 나룻배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사진으로는 1941년 31회 동문들이 4학년때 영춘 느티강변에서 야외수업을 하는 장면과 1940년의 아동학예 발표회 사진, 1960년대 영춘면 양조장 인근의 자동차와 시장터에서 교통경찰이의 수신호 모습, 1966년의 단양군 연합체육대회에서 최달식(54회)씨가 3천m달리기에서 우승한 장면 등이 사진으로 보관돼 있다.

특이한 만한 사진으로는 나룻배 통학모습이 1989년 영춘교와 북벽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학교를 다니던 모습, 또 영춘에서 제천을 왕복하던 정규노선의 통학버스가 하리 뱃터에서 브레이크 고장으로 강물에 빠진 모습 등이 생생이 남아있다.

또 1965년 7월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학교 건물과 1969년3월 철탑 고압선에 부딪혀 영춘초 앞 강변 백사장에 불시착한 미군 헬기 모습 등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6.25 당시 후퇴하던 인민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지원하기 위해 재남침하던 후원부대가 연풍면 의풍리에 집결하면서 1950년 12월25일 영춘면 소재지를 습격하면서 경찰과 방법대원 모두 철수한 무방비상태에서 가옥과 행정기관 건물, 학교 등에 방화를 해 모두 소각한 사건은 지금도 영춘면민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1966 시청각 연구학교 지정

'영춘초 100년사'에 따르면 19회 졸업생인 고 우계홍씨는 "학교가 생긴후 동대청 한 칸에 마련된 교무실 앞 밖에 처음으로 종을 달아놓고 시간마다 종소리에 학생들은 신이나서 뛰고 주믄들에게는 고루한 귀에 울리는 여명의 종소리와도 같게 들렸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1910년 한일합방이후 1912년 영춘 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13년 1회졸업식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한일합방이후 1916년 10월 처음으로 일본인 교장 상야감시가 부임해 이때부터 일본의 교육방법이 시작돼 한문과목이 폐지되고 한문교사를 없애고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수업에다 체조, 도화, 창가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실에는 일본국기를 게양하고 의식때면 일본국가를 부르고 일왕이 내린 교육칙어를 낭독했다. 영춘에서는 4회 졸업생이 서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대학교에 입학하는 유학생이 생기게 됐다고 수록하고 있다.

영춘초는 1971년에 학생수가 1천144명에 이르는 전성기도 있었다.

/김병학.이형수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영춘초 26회 졸업생 조태원 옹

현재 영춘초를 졸업한 졸업생중 26회(1923년) 졸업생인 조태원(91) 옹은 일제시대 당시의 아픈 역사를 몸으로 말해주고 있다.

몸이 불편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조 옹은 일제시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교실이 3칸으로 1,2학년과 3,4학년, 5,6학년이 함께 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일본인 교사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며 "당시 교장은 일본인 이었으나 한국학생들에게 잘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춘면은 단양군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2천명이었다"라며 "장날이 되면 시장이 가장 잘 섰다. 시장에 사람이 많아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미아도 발생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제시대와 6.25 당시 서울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영춘으로 내려와 살았다. 징집과 박해 등을 피하기 위해 남천 계곡에서 많이 살았다"라며 "산이 많아서 나무를 해서 광나루에서 뗏목 등을 만들어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또 "당시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지식인으로 취급받았다"라며 "나는 영춘면장과 어상천 면장 등 10년간 면장을 지냈고, 내 동생 조국원은 영춘초에서 교사로 30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현재 제자가 영춘초에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은 월급을 25원, 27원 정도 받았으나 나는 충북도청 앞에 있는 공무원 교육원에서 1년간 교육을 받고 영춘면에 첫 발령을 받아 35원 이라는 큰 돈은 월급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동생 둘이 교사를 지냈다"며 "경찰이나 면사무소 등에서 근무한 직원들은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많은 변동이 있었으나 교사는 이동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학교다닐 때 중머리에 고무신을 신고 무명책보에 책 몇권과 연필 한자루를 싸들고 다녔다"며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영춘초를 다니기도 했다. 그들은 영춘에서 하숙을 하기도 했다"고 당시 교육여건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어 "영무둔재(永無鈍才)라는 말이 있다. 즉 영춘에는 둔재가 없다는 말"이라며 "인재의 발원이 곧 학교이며 가정을 떠나 어린시절 학교교육이 한 인간의 일생을 만드는 본실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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