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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괴산 연풍초등학교

땀 맺힌 잣밭산의 추억…그리고 한 맺힌 일제의 수탈

  • 웹출고시간2015.04.09 19:26:31
  • 최종수정2015.08.17 14:53:29

편집자

광복 70주년을 맞아 당시의 시대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는 충북도내 학교중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교를 찾아 취재보도 한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들은 일제시대의 상황을 책자나 자료 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이들 학교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고 일본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어떠한 수탈과 만행을 저질렀는지 자세하게 기술한다.
충북도내에는 개교 100주년이 넘는 학교가 22개가 있다. 이중 20개 초등학교를 선정해 일본이 한국에 대해 어떠한 만행과 수탈을 진행해 왔는지 학교의 역사와 함께 취재 보도한다.
당시의 상황을 각 지역별로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은 학교로 이들 학교에 보관된 자료 와 현재 실존인물 또는 역사적인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마을 분들을 찾아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과 학교의 역사적인 가치와 역대 교장 등과 잔존 유물 등을 소개해 본다.
각 학교의 졸업생들의 당시 사진과 일본이 한국민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 그들의 수탈정책을 다시한번 되새겨 일본제국의 만행을 지면을 통해 고발하고 학교의 역사를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연풍초 전경

학교내에 동헌이 있는 괴산 연풍초(교장 손희순)는 지난 1909년 8월31일 사립연명보통학교로 개교했다.

개교당시 설립자는 안창우로 35명의 학생을 한국인 교사 1명과 일본인 교사 1명이 가르쳤다. 당시 교장은 이원흠이었다.

이후 1912년 3월 연풍공립보통학교 4년제로 인가를 받은후 일본인 교장이 1대부터 10대까지 1945년 8월 해방되기까지 33년간 10명의 교장이 연풍초를 거쳐갔다.

연풍초 교내에 있는 연풍면 동헌.

해방과 동시에 임시휴교에 들어갔던 연풍초는 일본인 교사들이 모두 물러간후 해방되던해 9월24일 군정청의 지시로 다시 개교했다.

해방후 처음으로 한국인 김달수가 교장에 취임하면서 연풍초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6.25 당시 남쪽에 신축했던 교사 4개교실과 교직원실이 대파돼 1948년 학교림이 잣나무를 상용해 교실을 증축했다.

# 잣밭산

연풍주민들에게 잣밭산은 추억과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전 연풍현에 부임하는 원님들은 이곳이 첩첩산중이라 유배 당하는 느낌에 무섭고 서러워서 울었고 떠날때는 후덕한 인심과 원님들이 잣죽을 못잊어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연풍주민들에게 잣밭산은 학교가 생기고 난 이후 이곳을 무대로 학교 난로에 땔 연료를 채취하러 잣밭산을 수없이 오르내렸고 토끼사냥과 돌배나무 선착순 돌아오기 등 학교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연풍 사람들은 학교와 잣밭산과는 하나처럼 느낄 정도로 가까웠다.

8.15 광복후 잣나무는 연풍초 교실 건축자재로 잣나무를 일부 사용하기도 하고 6.25때 전소 돼 잣나무는 찾아볼 수 없게 됐고 잡목이 우거지게 됐다.

이후 연풍초를 졸업한 동문들과 주민들은 잣밭산의 추억을 회상하며 2008년 3월 잣밭산에 1천200주의 잣나무를 심어 일제 강점기때 아픈 시련을 되새기고 있다.

잣밭산이라는 명칭은 연풍현 관아 동쪽 산에 수령 수백년의 잣나무가 울창하게 자생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상황을 연풍초 100년사를 통해 알아본다.

해방되던해 연풍초를 입학했던 윤한상(연풍초 42회)씨는 "나의 아버지는 조상때부터 땅 한평도 물려받지 못했다. 구한말 의병장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일제의 수배를 피해 수십년간 여기저기 떠돌면서 쫒기는 생활을 하는 동안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둔 죄로 아버지 형제분도 조령산 골짜기 신풍애서 부모와 떨어져 숨은 생활을 하시면서 청춘을 보냈다"며 "할아버지는 한 학자인데 아버지형제는 한문은 고사하고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셨다"며 일제의 만행에 가족들이 고통을 받으며 살았다고 회고록에 기술하고 있다.

그는 또 "아버지에게 구두를 사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다"며 "일제감정기가 가족을 모두 흩어지게 했다"며 치를 떨었다.

허명수(연풍초 46회) 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의기억에는 6.25때 여름철에는 율전 앞에 있는 동굴속에서 지낸던 일과 겨울 피난시절에는 아버지께서 비상식량으로 엿을 고아서 어께에 짊어지시고 그 위에 나를 태워 은티마을에서 가은을 넘어 지름티재를 올라가시면서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다 잠시 쉬어 갈 때면 하얀 눈을 한주먹씩 잡수시던 일,알산절에서 짭짭한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다섯 살때 기억만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잣밭산은 체육시간에 선착순의 목표가 돼 숨이 턱에 닿도록 수십번 오르내렸다는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며 "해방후 자유당 시절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께서 새로운 도로 확장 기공식에 학교에서(당시 중학교 2학년) 단체로 참여해 이화령 중턱에서 더위와 갈증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일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고 당시의 힘든때를 회상했다.

특히 "당시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배상마을 앞 하천부지에 대대단위 규모의 공병부대가 주둔해 공사를 담당했는데 열악한 장비와 인력으로 공사를 하다보니 몇해동안 걸려 완성한 것 같다"며 "공사당시 발파작업으로 예고 고함을 치고 잠시후 굉장한 폭음과 함께 크고 작은 돌 덩이들이 학교 운동장은 물론 수백미터나 떨어진 교촌, 괴정 마을까지 떨어져 공포스러웠던 기억들, 공병대 아저씨들이 나눠주던 귀한 선물인 건빵의 잊지 못할 맛은 지금도 잣밭산 하늘위로 스쳐 지나간다"고 말했다.

장윤덕씨가 일제시대 당시의 수탈 정책 등을 말하면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해방당시 연풍초 5학년 이었던 장윤덕(84·34회 졸업)씨를 만나 당시의 상황을 들어본다.

"해방하고 이틀 뒤에 알았어"

그는 일본인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등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장씨는 "해방 전 고학년들은 일본군에 의해 머루 덤불을 캤다"며 "아마 비행기 기름을 짜려 그랬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어 "수업할 시간도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당시 일본군이 군복을 만들기 위해 운동장에 목화를 빽빽이 심었다"며 "우리말을 쓰면 맞거나 벌을 섰다"고 덧붙였다.

장씨는 재학 당시를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은 징용으로 끌려갔고 학생들은 징용자 환송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며 "일본군들이 벼를 다 착취해서 우리는 보리나 잡곡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일제강점기 시설 힘들었던 우리네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장씨는 "해방까지 연풍초 교장들은 전부 일본인이었다"며 "적 폭격 대비훈련 등 군사훈련도 받고 아침마다 동쪽으로 일본 천황을 위해 참배를 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장씨가 연풍초에 다니던 1940년대 초는 식민통치 말기 시절로 일본은 사회 문화 활동 금지, 내선일체 등으로 우리말을 쓸 수 없었고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던 시기다.

장씨에 따르면 1943년부터 2년간 1천여명이 넘는 학생이 연풍초에 재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학년별로 2개 반이 있었고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아이들은 보통 와라지(草鞋: 일본 전통 짚신, 당시에는 짚신을 와라지로 불렀다고 한다.)를 신고 다녔는데 고무신은 부자들이나 신을 수 있었다"고 웃어 보였다.

장씨는 "해방하고 이튿날 해방 소식을 들었는데 학생이 모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다녔어"라며 이야기를 끝냈다.

/김병학.강준식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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