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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제천 동명초등학교

1907년 당시 제천군수였던 목원학씨와 유지들이 사립측량학교 설립
제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 432명 6·10 만세운동 앞서 일본에 항거
1945년 제천동명공립초→동명초등학교… 주변지역 개발로 존페위기 봉착

  • 웹출고시간2015.08.12 16:27:53
  • 최종수정2015.08.17 14:54:38

동명초 초기 교사 전경

◇ 사립학교의 출발

명치40년(융희원년) 7월, 폭도봉기후 1년이 지난 1907년 11월 20일 당시의 제천군수였던 목원학씨와 유지들이 의논해 읍부리에 처음으로 사립측량학교를 설립한 것이 동명초등학교의 첫 탄생이었다.

사립측량학교의 초대 교장은 심상륜(沈相倫)이었으며 초대 교감은 제천 출신의 황학수(黃學秀)였다.

동명초 8회 졸업식

초대 황 교감은 충청북도 제천 출신.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參尉)에 임관됐으며 그 뒤 부위(副尉)로 승진돼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의 교관이 됐다.

이후 1907년 8월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 당하자 고향인 제천으로 낙향해 동지와 협력,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에 전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학과는 논어와 맹자, 기타 한문서적을 배우고 이후 1909년 통역을 초빙해 일본어 과목을 더했다.

같은 해 6월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사립부명학교로 개칭하고 보통학을 첨가해 수업을 하고 고등과를 추가로 설치했다.

이어 1910년 6월 교감 임명과 함께 학생들을 1학년에서 3학년까지 편입시켰다.

이후 1911년 5월 18일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학생과 교사(교실)를 인수해 공립제천보통학교로 개칭하고 같은 해 8월 조선교육령 반포와 함께 실시하게 됐으며 교육령발표와 함께 공립을 뒤에 붙이게 됐다.

대정원년인 1912년 10월 원 수비대자리를 교사로 이전해 1913년 10월 26일 교육칙어를 내렸다.

대정7년인 1918년 10월 읍부리 서남쪽 땅 약3천평을 교지로 해 교사로 신축했으며 낙성과 동시에 이전한 것이 100여년을 이어온 제천시 명동의 동명학교였다.

공립 간판을 내걸고 학교 나이 13년을 지나며 동명초는 시대에 따라 점점 신장의 기세를 보였다.

1918년 이전한 교사가 협소해짐에 따라 1925년 가을 당시 학부형의 힘을 빌려 남측의 운동장을 남쪽으로 15간, 동서로 30간 모두 405평을 확장하고 북쪽도 화원 전부를 운동장으로 하고 남쪽의 정문을 북쪽으로 뒀다.

운동장을 재정비하며 체육상의 필요에 의해 이 또한 학부형의 힘을 빌려 체육기구를 설치했으나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 동명초 학생들의 40일간의 동맹휴학 사건

제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 432명이 6.10만세 운동에 앞서 일본에 항거해 40일간 동맹휴학을 하는 사건이 1926년 4월 26일 시작됐다.

사건의 발단은 하루 전인 25일 발생했다.

동명초 24회 학교수업

이날 오후 2시께 봄볕이 따가운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 432명이 조회대열로 정렬해 모였다.

키가 작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일본인 교장 오오사끼가 단상에 올라 국상(순종 붕어)이 났음을 전했고 모든 학생들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후 교실로 들어갈 때 학교 동쪽벽에 10여명의 6학년 학생이 모여 숙의했다.

이들이 숙의한 것은 일본인 교장이 "황제께서 붕어하셨다"고 표현해야 옳은 것을 보통사람과 같이 "순종이 죽었다"고 표현해 대한제국의 황제폐하를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이런 불손한 교장이 지도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동맹휴학을 결의한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학생회와 같은 '아동회'란 자치 조직이 있었는데 이 아동회를 통해 동맹휴학을 전개했으며 17세의 나이에 입학한 정운정 동문이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4월 26일부터 4~6학년 전부가 동맹휴학에 들어가고 이어 1~3학년 대부분까지 가세하니 전교생 432명중 등교자가 1학년 8명, 2학년 21명, 3학년 4명밖에 없었다.

동명초 38회 졸업식

당시 경찰은 학생 9명을 소환해 취조와 고문을 가했으며 이로 인해 학부형들의 태도가 강경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1주일 후 모든 학생이 석방됐으나 정운정 학생은 43일간의 감옥생활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후 학교장은 주동자 6명을 무기정학시키고 이로 인해 학부형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지며 사태가 험악해졌다.

정운정 동문은 간신히 퇴학을 면하고 1927년 제15회로 졸업했으나 당시 고문으로 한쪽다리를 절며 59세인 1963년 임종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날짜가 없고 기사만 있으며 글씨도 불분명해 그 후 내용을 알 수 없게 됐다.

◇ 광복전후와 6.25, 그리고 100년

1945년 광복 후 제천동명공립 초등학교에서 동명초등학교까지 2008년 100주년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6.25를 겪으며 전쟁으로 교실이 완전 소실되고 대형화재의 수난을 겪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광복 전에는 제천읍 지역에 학교가 하나여서 시험을 거쳐 입학을 했으며 탈락자는 면 지역으로 다녀야했다.

1942년 시작해 1944년 유일하게 강당을 신축했으며 강당에서 전교생 조회와 운동, 무용, 학예회 등을 하며 보람을 느꼈다.

광복후 제천 읍내에는 동명초와 일본인 학교인 대화초등학교(현 의림초등학교) 뿐이었으며 이후 학생이 엄청 늘며 홍광, 두학, 남당, 명지, 남천, 화산학교가 생겨 동명의 학구를 분산시켰다.

6.25 전쟁 이후에는 한반의 학생이 7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지며 오전오후로 나눠 공부했다.

동명초 1960년대 교사 전경

이후 동명초는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오며 2천명 이상의 학생 수를 유지했으나 주변지역의 발전과 개발 등으로 도심공동화를 겪으며 해마다 학생수가 감소, 한 학년에 2반 정도씩 수백 명의 학생수로 존폐위기에 봉착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고 말았다.

◇ 앞으로의 100년을 향한 동명초의 노력

이처럼 학교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동명초(교장 장병석)는 동문과 학교의 길고 긴 협의과정을 통해 학교 이전을 결정한다.

제천시청 인근인 천남동에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고 2013년 3월 1일 드디어 이전을 완료한 것이다.

새로운 교사로 이전하며 동명초는 같은 해 9월 동명역사관을 개관하고 100년이 훌쩍 넘은 학교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100년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현재 26개 학급으로 편성된 동명초는 '창의적인 생각과 건강한 몸으로 바르게 행동하는 어린이'라는 인간상을 추구하며 학교장의 경영관인 '바른 인성과 알찬 배움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동명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특히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실력이 자라는 어린이, 배려와 나눔으로 고운 인성이자라는 어린이, 꿈과 끼를 키워 행복이 자라는 어린이라는 3가지 주제로 노력하고 있다.

학생중심, 체험중심의 학습활동을 통한 다양한 학습경험을 제공하고 맞춤형 학습지도로 조화로운 학력제고에 힘쓰고 있다.

동명초 1935년 농촌봉사활동

또 1인1품성 가꾸기와 전교어린이회의 자치활동과 봉사활동을 강화하고 소통과 칭찬문화 활성화로 배려와 존중의 생활태도 함양을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 창의력과 감수성을 키우는 방과후학교 운영 활성화와 스포츠클럽과 예술강사 지원 수업을 통한 체육·예술활동 강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외에도 동명초는 우리의 얼 찾기와 나는 세계 스타, 행복한 책 여행 등 특색 교육을 통해 전통을 계승하고 글로벌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며 바른 인성과 지성을 키워가는 독서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이 학교 장병서 교장은 "동명초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슴에 품고 앞으로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며 아이들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학생과 학부모, 교사는 물론 지역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꿈을 키우며 새롭게 도약하는 동명초를 그려가겠다"고 말했다.

/ 김병학·이형수기자

<인터뷰> 동명초 36회 졸업생 송만배씨

"일제강점기 시절 전쟁물자 공급을 위해 동원된 아이들이 고사리 손을 다쳐가며 관솔을 채취하고 겨울이며 토끼를 잡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었어."

동명초등학교 36회 졸업생인 송만배(80) 북부포럼 위원장은 학교 다닐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며 말문을 열었다.

송 위원장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며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름 즐거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입학한 해가 일본이 한창 전쟁지역을 확산시키며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수탈이 점점 심화되던 시기였다"며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도 작은 내가 비행기와 탱크 등에 사용하는 기름을 뽑기 위한 관솔채취에 동원돼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겨울에는 토끼를 잡기위해 얼어붙은 고사리 손을 호호 불어가며 고생을 했던 기억도 난다고 했다.

또 그 당시에는 전쟁이 대한 대비로 인해 운동장에 방공호와 같은 구덩이를 파 운동장을 전혀 사용하지도 못했으며 화장실은 50여명이 일렬로 사용하며 오물이 웅덩이 한 곳에 모여 아주 열악한 환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송 위원장은 "한 번은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한 학생이 오물 웅덩이 빠져 일본인 여자 담임에게 많이 맞은 적이 있었다"며 "제대로 된 벤또(도시락)를 싸가지고 다는 아이는 한 학년에 두세 명 정도로 가난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강당을 짓기 위해 3~6학년 학생들은 강제리(현 강제농공단지) 벽돌공장에서 하루에 세장을 꼬박 학교까지 옮겨야 하는 등 공부 이외의 노동력 착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어려운 시절이기는 했으나 일본인 교사가 모두 아이들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며 "총독부의 지시로 일본역사와 왜곡된 한국역사를 가르치기는 했으나 그 외의 과목에서는 여느 교사들처럼 성심성의껏 교육을 펼쳤던 것으로 기억한다"고도 했다.

끝으로 송 위원장은 "제천의 교육역사를 대변하는 동명초가 어렵고 힘든 시절과 만개했던 시절을 거쳐 100주년을 즈음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었었다"며 "이전한 교사의 좋은 시설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새로운 동명 100년을 빛낼 것으로 충분이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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