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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보은 삼산초등학교

혼은 삼산에 꿈은 세계로

  • 웹출고시간2015.06.11 17:04:02
  • 최종수정2015.08.17 14:53:59

보은 삼산초 전경

[충북일보] 1909년 9월1일 사립 완명학교로 개교한 보은 삼산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후의 좌우대립,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전쟁과 같은 역사적인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인재를 배출해 왔다.


한일합방 1년전 일본인 교장이 부임한 이후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기까지 10명의 일본인 교장이 거쳐갔다. 한국인 교장은 해방하던 해 9월1일 김기형 교장이 첫 취임했다.

보은 삼산리의 명칭은 동변리, 서변리, 하장리를 병합해 세 개의 산 즉, 저(돼지)산, 와(개구리)산, 사(뱀)산이 서로 견제하며 지켜주는 좋은 곳이라 해 삼산이라고 불렀다.


삼산초는 외인초와 같은 해인 1906년 사립학교인 완명(4년제)으로 개교했으나 개교한 근거가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특히 보은 삼삼초와 회인초는 같은 해 개교를 했으나 학교연혁 등 자료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사라졌다. 이에따라 1909년 9월1일 사립완명학교로 개교한 것을 근거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또 개교기념일은 1911년 6월1일 보은공립보통학교 4년제로 재 개교한 날을 학교 기념일로 정했다.

보은에는 상현서원이 1555년 현재의 삼년산성내에 있었고 이 서원은 1672년 장안면 서원리로 이전했다.

금화서원은 삼승면 선곡리에 1814년 세워졌고, 병산서원은 1737년에 마로면 기대리에 세워졌다가 1802년에 구병산을 이전했다.


이외에도 보은군내에는 서당으로 석천암(보은읍 성족리), 대곡사(종곡리), 고봉정사(마로면 관기리), 염수재(탄부면 하장리), 추양정사(회남면 신추리), 풍림정사(회복면 눌곡리) 등이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써왔다.

삼산초 교육자료관에는 일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관련 물품과 학교역사가 남아있다.

삼산초 1회졸업생(1913년)은 11명, 2회 13명, 3회 17명, 4회 11명, 5~8회 64명, 9~10회 28명 등을 비롯해 해방되던 해인 32회(1945년)에는 212명 등이 졸업했다.

삼산초는 보은의 산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교내의 교육자료관에는 해방되기전 학교 개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삼산초는 3명의 교육감을 배출해 낸 곳으로 유명하다. 충북의 초대교육감 윤봉수, 5대 최성렬, 11대와 12대 김천호 교육감이 삼산초 출신이다.

/김병학·강준식기자


"학교생활은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였다"

김권수

해방되던해 삼산초 3학년이었던 김권수(78)씨는 "아침에 일과시작전 일본천황에게 인사를 먼저하고 공부를 시작했다"며 "학교에서는 일본말, 집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 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통하지도 않아 학교생활이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서 일본말을 잘못하고 실수를 범하면 선생이 신고있던 끌신으로 학생의 빰을 사정없이 때렸으며 군대처럼 운영됐다"며 "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무조건 복종을 해야 했돈 그 시절의 학교생활은 공포의 연속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대부분의 학생들의 옷차림은 솜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다녔으며 짚신과 게다 또는 검정고무신을 신었고 1년에 몇차례씩 공습경보 발령이 떨어지면 수업도중에 책보를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신발끈이 떨어지면 겨울에 맨발도 걸어가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당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특히 "일주일에 한번씩 쇠붙이, 놋쇠, 수저, 솥단지 등을 모아 학교로 가져가 바쳐야했다"고 말하며 "일본 선생들은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어 전쟁에서 이겨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심지어는 성과 이름까지 개명했다"고 회고했다.

또 "해방되던 날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궐기대회를 하며 여러날을 괭과리 치며 좋아했던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고 있다"고 회상하며 "그때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처음 들었고 알게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삼산초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김권수씨는 정신적인 지주로 5학년때 담임이었던 임형순 선생과 6학년 담임이었던 원형낙 선생을 들고 있다.

그는 "5,6학년때 한국인 은사님들이 민주적 지도가는 떠난 뒤에 자국을 남기기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며 "모교에서 10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이 말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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