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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청주 청남초등학교

청주읍교회 신도들과 선교사들 1904년 청주 사립광남학교 설립
1908년 청남학교로 개명하고 민족의식·애국사상 가르쳐
항일 애국의 에너지 제공하고 충북 신교육의 원동력 제공

  • 웹출고시간2015.09.17 19:49:59
  • 최종수정2015.09.17 19:51:18
[충북일보] 한국의 근대교육은 기독교에 의해 전래되고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근대교육이 함께 이루어졌다.

청남학교 창립 30주념 기념촬영(1935.3.19)

교회로 찾아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신자들의 의식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교육에 주력했다. 교육의 내용은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교육과 신앙생활을 위한 성경공부였다.

충북에서도 교회에 예배당이 마련되면 학교를 병설해 운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청남학교다.

민노아 선교사를 비롯해 청주에 온 선교사들도 기독교복음을 전파하는 방안으로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선교를 택했다.

청주읍교회와 선교사들이 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을 시도했고 이렇게 등장한 것이 1904년 청주에 설립된 기독교 계통의 사립 광남학교(청남학교의 전신)다.

광남학교는 1904년 11월 김태희 방홍근 김원배 등 교육구국의 이념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방홍근의 집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교육한다'라는 뜻에서 '광남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초창기 청남학교의 위치

이 학교는 개화사상에 의해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는 근대교육기관으로 1907년에 설립된 청주보통학교보다 3년이나 앞서 존재한 청주지역 최초의 학교인 동시에 근대학교의 효시가 됐다.

이후 1908년에 교명을 사립 청남학교로 바뀌었으며 청주지역 민족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설립당시 15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들은 2개반으로 나누어 2개 교실에서 교육을 했다.

1908년 민노아 선교사가 학교 운영권을 인수받아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보부상 조합으로부터 기와집으로 된 학교건물을 매입했다.

처음에 교실로 사용하던 방홍근의 집은 벽에 금이가고 마루바닥과 지붕도 남루해 200달러의 성교부 후원과 50달러의 교회헌금으로 1908년 4개의 교실을 갖춘 건물을 매입했다.

1908년 학교명을 청남학교로 개명했다. 청남학교라는 이름은 학교가 청남문(청주읍성의 남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과 당시 청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기독교 학교를 세운것과 연관이 있다.

괴산 청천리의 청천교회 청동학교, 청주 신대리의 신대교회에서 청서학교, 묵방리의 묵방교회에 청북학교라는 명칭에 따라 청주읍교회에 속한 이 학교를 청남학교라고 명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하교는 1909년에 설립허가를 받았는데 언제까지 존속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정인란씨가 간직하고 있는 1934년(24회) 졸업생들의 기념사진

청동학교와 청서학교는 농촌에 위치해 운영난으로 1910년대에 사라지고 사숙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이고 묵방교회에서 운영하던 청북학교는 1927년까지 기록이 교회록에 남아있다.

묵방교회 출신 박덕봉씨는 1932년 일제의 폐쇄정책에 못이겨 청북학교는 학술강습소로 개칭되면서 학교의 간판을 내렸다.

청남학교는 1921년 학제가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었고 1923년 여자학교인 청신학교와 통합해 남녀공학이 됐다. 1924년 망선루로 교사를 이전했다.

학생수는 매년 약 20여명이 입학해 100명 내외의 학생이 있었고 3~4명의 교사가 있었다. 1930년 5월 학생수는 남학생이 51명, 여학생이 44명으로 95명이었다.

교육과정은 1~2학년은 수신 국어 조선어 산술 도화 창가 체조 수공 가사 재봉, 3~4학년은 이과, 5~6학년은 역사와 지리를 이수했다.

청남학교는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을 강조했다. 사립인 청남학교는 수업시간에 학생등에게 애국과 반일감정을 고취시켰다. 토요일은 '외울말씀'이 있었다. 기독교 학교인 관계로 성경시간을 별도로 두어 종교교육에 임했다. 종교교육은 1915년 개정사립학교규칙이 제정되면서 사라졌다.

1936년 신사참배 문제로 청남학교가 휴교처분을 당하기 전까지 교사인 김태희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3.1운동이후에는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의 충북참사로 활약했다. 곽재기 교사는 만주 길림성으로 들어가 의열단을 결성해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청남학교 주최 한글학자 최현배선생 초청 한글강습회(1932.8.10)

교사였던 신공균은 1920년대 한국군 장교복 차림에 긴칼을 차고 나팔을 불면서 한국 군대식 구령과 동작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여교사였던 정순경은 음악을 통해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을 북돋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됐을 때 항거해 투옥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강제퇴학을 당하거나 구속되기도 한 학생들이 많았다.

1942년 7월 김용태가 토지 2만평을 기부해 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으로 취임후 현재의 위치에 건물을 지어 배움의 터전을 마련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후 그해 9월24일 '청남'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아 청남국민학교로 불리우게 됐다.

청남학교는 일제침략으로 인한 민족수난 과정에서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 얼을 지키고 항일 애국의 에너지를 공급했으며 충북 신교육의 원동력을 제공해왔다.

안인혁 교장은 "청남초등학교는 일제시대 오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며 "당시 졸업생들과 교사들이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민족의 역사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김병학기자

<인터뷰> 청남초 31회 졸업생 정인란씨

"일제시대 청남학교는 조선어독본을 배우고 한글과 한문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일제시대 당시 청남학교를 다녔던 정인란(여.89.31회 졸업생) 할머니는 "여학생들은 재봉시간에 색실로 수를 놓고 바느질을 배웠다"며 "긴머리를 따서 댕기를 틀고 겨울이면 솜두루마기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남학생들은 솜바지에 저고리를 입고다녔고 여학생들은 솜바지 저고리에 검정치마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며 "남자와 여자가 완전 구분이 돼 남학생들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며 수줍어했다.

또 "최창남 선생님의 재교육으로 조선말을 할 수 있었으며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름과 성을 바꾸기도 했다"며 "내 이름은 정인란인데 광전희자(미쓰다 아끼꼬)라고 이름을 개명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아침에는 일본왕이 있는 쪽을 향해 궁성요배 하라고 하고 내선일체라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라며 "매일 낮 12시에는 싸이렌소리와 국기에 무운장구라는 묵념을 시켰고 저녁때가 되면 식량배급을 주는 데 배급을 타려고 줄을 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매달 초하루에는 우암산에 있는 신사참배를 할 때 최창남 선생이 거부한 적이 많아 민족의식을 배우기도 했다"고 강요에 의한 신사참배라는 것을 들려주었다.

수학여행에 대해 "서울 남산과 조선신궁으로 불이었던 경복궁, 화신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 보기도 했다"며 "서울의 종로 삼산여관에서 쉬고 인천 월미도 앞 바다를 구경하고 왔다"며 여행의 재미를 회상했다.

또한 "청남공립학교가 발전해 월드컵의 주역 선수들을 배출해 내면서 학교 이름을 떨치게 돼 감사하다"라며 "청남학교 후배들이 나라의 기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초등학교 졸업후 얼마있가 정신대에 끌려갈뻔 했으나 아버지가 결혼을 하면 안간다고 해 결혼을 빨리했다"며 "지금생각하면 아찔하다"며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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