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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10.30 13:48:59
  • 최종수정2023.10.30 13:48:59

박수근 화백.

우리나라 사람들은 혈연, 지연을 중시한다. 그리고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고, 같은 학교를 나온 선후배들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준다. 이를 학연이라 한다. 혈연, 지연 못지 않게 생각한다. 학생들이 서로 가고 싶어하는 학교로 평가받으려면 역사, 시설, 교수진 등 여러 가지 요건을 최고로 충족해야겠지만, 그 학교 출신 선배들이 영향력 있는 자리에 얼마나 많이 분포돼 있는지가 평가 기준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으나 유난히 인맥을 중요시하는 미술계에서 학벌이 좋은 것도, 돈이 많은 것도, 하다 못해 영향력 있는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닌, 지방에 있는 초등학교 학력에 독학으로 미술 공부한 것이 전부인 상태에서 '국민화가'가 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박수근(1914~1965) 화백이다. 그는 열악한 조건에서 어떻게 사후 국민화가가 되었을까?

이것에 대해 어느 분의 말을 빌려본다.

첫째, 성실한 생계형 화가였다. 그림을 팔아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기에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그림이 좋다.

둘째,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꿋꿋이 고수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추상미술이 들어와 유행했지만 박수근은 한눈 팔지 않고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단순한 구도와 거친 질감으로 표현했다.

셋째, 박수근은 자신의 그림 안에 철저하게 자신 주변의 삶을 담았다.

장남 박성남을 모델로 한 그림과 박성남 화백.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비범했던 박수근의 삶이 그를 미술사에 남는 작가로 만들었다. 현재 우리나라 초·중등 미술 교과서 대부분에 박수근의 작품이 나온다. 명실상부한 국민화가다. 그의 그림 '빨래터'가 2007년 미술품 경매에서 45억2천만 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생전 그는 한 번도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수술할 돈이 없어 한쪽 눈이 실명했고, 51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면 박수근의 그림값은 호당 1억 원이 넘는데 가족들은 비싸게 오른 아버지의 덕을 보고 있냐는 질문에 아들 박성남 화백은 "나도 아버지의 그림값이 때로는 의문이다. 살아생전에는 평가받지 못한 그 그림들이 억! 억! 하다 보니 자꾸 금고 속에 들어가는 현실도 안타깝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그림은 마티에르 하나하나가 쌀이었고 학비였다. 그 걸로 족하다. 유족에게 그림의 가치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다만 쌀 몇 말에 팔리던 게 어느 순간 상류층의 재테크 수단이 되면서 서민들의 삶과 멀어지고 있다. 누구나 향유할 수 있게 공공 미술관에 더 많이 걸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근 작품.

박수근은 1950년대 미군 매점에서 사진을 보고 가족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일을 했다. 당시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1970년에 쓴 소설 '나목'을 통해 박수근이 그 참혹한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그리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들 박성남은 "소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가족, 이웃과 나라를 사랑했다, 지극히 평범했다. 걸레질도 하고 빨래도 널고 요강도 닦고 이불도 개고 마당도 쓸었다. 12살에 밀레 같은 화가를 꿈꾼 소년이었고, 사후 40년 만에 한국의 밀레가 되었다. 흰 고무신에 하얀 난닝구(런닝셔츠)를 즐겨 입던 아버지가 미술계의 거목이 됐다. 제게 아버지는 하루하루 성실한 삶이 결국 리더로 이끈다는 교훈을 주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증언을 보면 화가 박수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박수근은 미군 매점에서 미군들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소품들도 많이 팔았다고 한다. 한국 근무를 마치고 떠나는 미군들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에서 마땅히 사갈 것이 없어, 기념품으로 한국적 냄새가 물씬 나는 박수근의 그림들을 사 간 것이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박수근이 호당 억대 가는 작가가 된 줄 모르고 어디선가 먼지 쓰고 잠자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런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이 로또복권 당첨보다 훨씬 쉽지 않겠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박수근 가족.

박수근은 자녀 2남2녀 중 두 명을 잃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화가 박성남이고, 딸은 박인숙으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 박인숙은 교장선생님의 근엄함을 버리고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KBS 인간극장'을 통해 본 기억이 있다. 그녀는 미술 교사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단발머리 '소녀' 작품을 설명하면서 "이 그림은 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저를 모델로 해 그린 것"이라고 하면 학생들이 많이 재미 있어 했다고 한다, 강원 양구에 가면 박수근의 생가터에 '양구군립미술관'이 있다. 처음 미술관이 지어졌을 때 전시할 박수근 작품이 없었다고 한다. 미술관 건립을 구상한 1997년부터 박수근 그림값이 곱절로 뛰어 도저히 강원도의 작은 군 예산으로는 구입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유족들도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고 싶어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이런 사정을 들은 갤러리현대 박명자 관장은 과감하게 박수근에게 결혼 선물로 받은 '굴비' 그림을 박수근미술관에 기증한다. 엄밀히 말해 기증이 아니라 받은 선물을 돌려준 것이다. 195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관장 이대원, 홍익대 총장 역임)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일했던 우리나라 미술계의 큰 손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은 그림 팔러 드나들던 박수근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조재진 콜렉터도 '빈수레'라는 작품을 기증한다. 현재는 양구군이 어렵게 구입한 3점을 보태 모두 5점의 유화를 갖춰 그나마 박수근 미술관의 체면을 지키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에 가면 전망을 해치는 군인아파트를 가려주는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홍라희 리움 관장이 1억 원을 기부해 조성된 것이라 한다. 이를 볼 때 박수근은 복이 많은 작가고, 미술가들은 작품 팔려고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작품 보존과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박수근 미술관.

천동설이 일반화됐던 시대에 겁도 없이 지동설을 주장했던 이탈리아의 갈릴레이가 죽은 다음 해인 1643년에 걸출한 과학자가 될 아이가 영국에서 태어난다. 그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영혼이 뉴턴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들 한다. 국민화가 박수근은 1965년에 세상을 떴다. 필자는 그가 죽은 해인 1965년에 태어났다. 혹시 박수근의 영혼이 나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하며, 정신 나간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누구에게 말은 못하고 혼자 착각하며 흐뭇해 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박수근 화백이 1965년에 돌아가셨네"라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말하니 "그분이 당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까?"라는 말이 돌아온다. 40년을 옆에서 지켜보니 행동하는 것이 박수근 화백과 필자가 많이 닮았거나 아니면 박수근같이 비싼 그림값을 받는 작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겨울 방학을 하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강원 양구에 가봐야겠다. 박수근이 필자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났다면 양구군교육청에 있는 박수근이 즐겨 그렸다는 '박수근 나무'와 박수근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들과 흔적들을 보면 전생에 많이 봤던 것에서 오는 익숙한 느낌이 오지 않을까?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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