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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3.09 15:49:48
  • 최종수정2023.03.09 15:49:48
빛나는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가 가득 찬 작품세계로 독자적인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17세기 유럽의 대표 화가 중에 루벤스(1577~1640)가 있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 '한복 입은 남자'라는 드로잉(drawing) 작품이 있다.

'drawing'이라는 것은 소묘(素描)라고도 하며 단색으로 어떤 이미지를 그리는 것을 말하며, 채색하기 전 밑그림으로 많이 그려진다.

이 그림은 198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드로잉 작품 사상 최고인 32만4천파운드(6억600만 원)에 낙찰되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다.

17세기에 우리 조선은 유럽과 교류가 전혀 없었는데 세계적인 거장이 어떻게 한복입은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을까?

루벤스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제목과 그 외 그림에 관련된 정보를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림 제목도 경매를 내놓기 전 크리스티 경매사 직원들은 제목을 붙이기 위해 전 세계의 의상을 샅샅이 살펴보는데, 한국의 '철릭'이라는 의상과 그림 속의 모델이 입은 옷이 유사함을 발견하고 '한복 입은 남자'라고 붙인 것이다.

그림 속 남자는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관모를 쓰고 있다. 얼굴 생김새는 몽골리안 계통에 가까우며 눈에 쌍꺼풀이 있고 수염은 짧게 깎았다. 양 볼과 코, 입술, 귀 등의 약한 붉은 색은 생기가 느껴진다. 입고 있는 옷은 조선 시대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구별 없이 널리 입었던 철릭(天翼)이라는 의복과 비슷하다. 양손은 교차해 반대편 소매 속에 넣었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모습이다. 자세히 그림 배경을 자세히 보면 희미하기는 하나 돛을 단 범선이 그려져 있어 그림 속 인물이 먼 곳에서 온 방문객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 이 그림에 그려진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이에 학자들이 퍼즐 맞추기를 통해 밝혀진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조선 젊은이가 정유재란 때 왜구에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라는 상인에게 이탈리아로 노예로 팔려가는데 거기서 루벤스를 만나 모델이 됐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자서전 '나의 세계 일주기'에 조선인이 로마에서 세례명 '안토니오'로 산다는 얘기가 나오고, 이를 소재로 한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1993년 출간돼 200만부 이상 팔린다. 이어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가 2004년 연구서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를 통해 조선인 노예가 루벤스의 모델이 됐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류 문화학자인 토비아스 휴비네트는 17세기 이탈리아에는 알비마을에 코레아 성을 쓰는 사람들이 200명 정도 집단 거주했고 그 집성촌에 있던 조선 남자 그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하나의 설은 네덜란드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루벤스의 드로잉 작품 '한복 입은 남자'(1617년 작)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조선인을 그린 것이 아니고, '중국 상인 이퐁(興浦)'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드로잉 작품을 토대로 루벤스가 그린 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7~1618년 작)과 자신이 발굴한 1601년 익명의 작가가 그린 중국인 이퐁 초상화의 유사성을 들어 이같이 주장한 것이다. 이퐁의 초상화에는 한자로 '대명지분 객흥포(大明之焚 客興浦)'라는 국적과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베스트스테인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사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복식에 나타난 망건과 끈을 맨 신발, 도포의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을 토대로 루벤스가 최소한 한복을 입은 인물을 직·간접적으로 보기는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고,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 그림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이 경매에서 낙찰받아 가면서 그림 이름을 '조선 남자'로 바꾼다. 이를 볼 때 루벤스가 그린 모델이 조선 사람일 것이란 학계의 해석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루벤스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 제목이나 그림과 관련된 정보를 적어 놓았다면 400년 후에 퍼즐 맞추기는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루벤스는 사업수단이 뛰어난 CEO형 화가였다. 수 많은 조수들을 고용해 그림공장을 운영하면서 주문받은 그림들을 납품했는데, 대부분의 그림을 조수들이 그리고 최종 마무리만 루벤스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여건에서 대작을 그리기 위한 드로잉 작품에 그림에 대한 정보(제목)를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림 속의 남자는 누구이며, 모델이 조선인이라며 어떻게 400년전 미술계의 거장 루벤스 작품의 모델이 될 수 있었을까? 수수께끼의 정답은 루벤스만이 쥐고 있으나 그는 400년전 이승을 떠났다.

그림 속의 한 남자는 비밀을 간직한 채 지금도 그림 속에서 우리를 직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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