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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 이야기' - 평생 산을 사모한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 유영국

평생 산을 사모한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 유영국

  • 웹출고시간2024.04.16 17:35:16
  • 최종수정2024.04.16 17:35:16

유영국, 산, oil on canvas, 97×162.2㎝, 1959.

ⓒ 뉴시스
그림을 팔아 생활하는 전업 작가를 보면 존경스럽다. 작은 텃밭에 상추, 고추를 심어 밥상에 올리는 것은 작은 기쁨이지만, 이것들을 팔아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부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처럼 전업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림을 팔아 생활하는 것이 어려워 작품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또 다른 직업을 갖는다. 필자도 전업 작가로 살아갈 용기가 없고 가정형편을 고려해 학비가 적고 교사 발령이 보장된 국립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지망했다. 대학 졸업 후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하며 작업 활동을 병행하다가 한달 전에 33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사이비 전업 작가'의 길을 시작했다. '사이비'라는 표현을 한 것은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되는 얼치기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갖는 여러 직업 중 최고는 미술대학 교수다. 되기는 어려워도 교수가 되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일단 대학교수 작품이라고 하면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매매도 잘 된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혜택이 주어지는 철가방 교수직을 작품 활동만 하겠다고 대책 없이 용감하게 그만둔 작가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홍익대학교 미술대 학장을 하다 큰물에서 놀겠다고 프랑스로 날아간 김환기, 이화여대 교수를 그만두고 충북 괴산 첩첩산중으로 은거한 황창배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유영국이다. 필자는 대학에서 이완호 교수에게 서양화 실기와 대학원에서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배웠는데, 교수님께서 홍익대학교 다닐 때 유영국 교수실에서 그림을 배운 이야기를 해주신 기억이 난다. 1960년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은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교수를 선택해 배우는 교육과정이었다고 한다. 유영국 화백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스승의 스승이니 필자도 작은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 2023년 11월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에 유영국 작가의 주요 작품들이 걸려 있다.

ⓒ 뉴시스
"유영국이 없었다면 한국 미술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한국 20세기 미술사에 유영국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마 한국 현대미술사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유영국은 우리나라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다.

유영국(1916-2002)은 지금은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강원도에 속해 있었던 울진에서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해 아버지와 형들이 가족회의까지 열어 유 화백을 서울로 보낸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였다. 둘째 형이 이 학교 1회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기를 선택하게 된 것 같다.

그 당시 학교는 만주사변 등으로 딱딱한 군국주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자유주의 교육관과 예술관을 지닌 미술 교사 사토 쿠니오(1897-1945)를 만나 미술가의 길을 가게 된다. 유영국 외에도 사토 쿠니오의 영향을 받아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정현웅, 심형구, 이대원, 권옥연 등이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한다. 사토 쿠니오 미술 교사를 보면 미술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되고, 미술 교사로 33년을 보낸 필자는 훌륭한 작가들을 많이 키워내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유영국은 경성 제2고보 4학년 때 키가 크고 공부도 잘해 일본인 담임교사가 급장(반장)을 시킨다. 그러더니 뒷자리에 앉아 누가 잘못했는지 날마다 일러바치라는 지시를 한다. 담임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자 수차례 구타를 당한다. 그때부터 학교 다니기가 싫어진 유영국은 고민 끝에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린다. 이처럼 유영국은 소신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은 또 있다. 일본으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간 유영국은 문화학원 시절 색채가 작렬하는 표현주의적이고 야수파적 기질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문화학원은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뎃생과 구상화 지도 담당인 '이시이 하쿠테이' 교수는 보수적인 경향이 짙었다고 한다. 이시이 하쿠테이 교수와 의견충돌이 있었던 유 화백은 그리던 그림을 뒤집어 놓고 뛰쳐나온 후, 그의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에는 '50년 미술협회 창립전' 개최를 2주 남짓 앞두고, 서울대학교 미술부장 장발(장면 총리의 동생) 교수가 전시 참여와 국립대학 교수직 중 택일을 요구하자, 2년 3개월 동안 재직하던 교수직을 그만둔다. 후에 홍익대학교에 근무하다가도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교수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지난 2023년 11월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를 찾은 한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 뉴시스
그는 예술가로서 드물게 나약하지 않고 생활력이 강하고 경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 중 생계를 위해 리어카를 빌려 교외에서 장작을 패다 팔기도 하고, 1·4 후퇴 시 가족과 함께 고향 울진으로 피난 가서 거의 폐허가 된 부친 소유의 양조장을 수리해 운영에 착수한다. 양조장 운영을 위한 원료 수급, 술 제조 배달 등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술지게미로 여러 마리의 돼지를 사육하는 등 강인한 생활력과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관동지방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여기엔 화가로서의 경험과 상상력도 한몫했다고 한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회사를 잘 운영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고, 그림을 다시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온다.

"돈은 살아가는데 수단이 돼야지 그것이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 돈이 없어도 그림을 못 그리지만, 돈이 너무 많아도 그림을 못 그린다"라고 말했다는데 이를 보면 그가 잘되는 사업에서 손을 뗀 이유를 알 것 같고, 유영국의 투철한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유영국의 이러한 강인한 생활력은 같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생활능력이 없어 처자식을 일본 처가로 보내고 그리워하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는 나약한 이중섭과 비교된다.

유영국 화백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가로 평가받고 있는데, 평생 추상화만을 그린 이유를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었다. 일제강점기 무엇을 해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 속에서 그는 미술을 통해 자신만의 자유로운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중에서도 어떤 객관적인 법칙이나 의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추상의 세계에 빠르게 접근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영원한 자유인 유영국은 2002년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한 달 후 86년간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친다.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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