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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3.27 17:02:08
  • 최종수정2023.03.27 17:02:08

장욱진

옛사람들은 오복(五福)이라고 해서 오래 사는 것(壽), 부자로 사는 것(富), 귀하게 사는 것(貴),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한 것(康寧), 자손을 많이 두는 것(子孫衆多)을 갈구했다.

여기에 예술가들의 오복은 자손중다(子孫衆多) 대신에 작품중다(作品衆多)로 돈 걱정 안 하고 맘껏 작품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가의 오복을 마음껏 누리 다 간 화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장욱진(1917~1990)이다.

"나는 심플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평생을 자연 속에서 단순하고 천진난만한 삶을 살면서 집이나 가족, 아이, 나무, 새 등 가정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들을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와 자신만의 독특한 색감으로 표현한 '동심의 화가'로 불린다.
피카소가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데 4년이 결렸고 어린아이처럼 그리는데 평생이 걸렸다."는 말을 했는데 장욱진은 짧은 시간에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것을 터득한 천재 화가였다.

그가 돈 걱정 안 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과 남편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생활력이 강한 여인과 결혼한 덕분이다.

2022년 103살로 별세한 장욱진 화백의 부인 이순경(1920~2022)은 아버지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사학자 이병도이고, 서울대 총장을 한 이장무와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을 지낸 이건무의 누나로 명문가 출신이다.
이순경 여사는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그림만 그릴 줄 아는 배우자를 만나, 서점(혜화동 로타리 동양서림)을 운영하며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남편은 물론 1남 4녀를 뒷바라지한 슈퍼우먼이었다.

장욱진의 삶을 살펴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워 부인과 두 자식을 일본 처가로 보내고 가족들 얼굴 한번 못 보고 그리워만 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생각난다. 이중섭에게도 이순경과 같은 부인이 있었다면 불행하게 살다 요절하지도 않았고, 우리 한국 미술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장욱진 생가

필자는 장욱진 화백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생가가 있는 충남 연기군 동면 송용리(세종시)에 두 번 가 본 적이 있다. 1995년에는 생가만 보고 왔고, 최근에 갔을 때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묘소까지 가 보았는데, 후학들이 만든 유골을 모신 탑비가 인상적이었다. 화강암과 오석으로 만들고 표면에는 장욱진의 작품을 넣은 것이 심플한 조각작품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필자가 대학 다닐 때 L교수님이 계셨는데, 학창시절 은사였던 장욱진 화백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이 40년이 지났는데도 선명히 머리에 남아 있다. 장욱진은 실기 강의시간에는 별로 말이 없다가 저녁 때 대학가 술집에 나타나 신고 있던 구두(군화)에 막걸리를 따라 제자들에게 돌렸고, 평소 그림을 그릴 때는 술을 안 마시다 작품 완성 후에는 왕소금을 안주 삼아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기억난다.

"나는 그림을 그린 죄밖에 없다. 나는 가족을 사랑했다. 다만 그것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내가 죄가 있다면 그림 그리는 죄와 술 먹은 죄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은 없다. 그림과 술과 나는 삼위일체인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가족, 술, 그림을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장욱진은 각박하고 번잡한 도시 생활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에는 안정된 직업인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 근교의 시골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활한다. 그 영향으로 작품들은 시골 생활과 자연환경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47세 되던 1963년 경기도 남양주 덕소의 한강 변에 작업실을 짓고 12년 동안 홀로 살며 창작에 매달린다.

50대 후반이 되어서 덕소가 개발되기 시작했을 때 그곳을 나왔다. 덕소를 떠나 한동안 서울 명륜동에서 생활했지만, 1980년 온천으로 유명한 충북 수안보로 내려가 다시 시골 생활을 한다. 그러나 1985년 수안보 역시 개발붐이 일어 쫓기듯 그곳을 떠나게 된다. 장욱진이 1986년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경기도 용인의 한 고택이다. 장 화백은 이곳에서 1990년 작고할 때까지 5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

필자는 오래전 덕소에 갔을 때 장욱진이 살던 곳을 보고 싶어 식사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주인에게 "혹시 장욱진 화백의 작업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라고 여쭤보니 "장욱진이 누구냐?"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이 생각난다. 기회가 되면 필자의 집에서 멀지 않은 수안보에 가서 선배 화가의 흔적을 찾고 싶다.
막내아들이 백혈병으로 15세에 죽자 화장해 수안보에 뿌렸는데, 본인도 죽으면 화장해 수안보에 뿌려달라고 할 정도로 애착을 보인 곳이다.

무려 22년간 우리 안방극장에서 고향의 진한 향수와 감동을 전해줬던 '전원일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김 회장 역할을 했던 최불암이 연기할 때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 10여년 간 교류했던 장욱진 화백이었다고 한다. 꼿꼿한 면모와 가식이 없는 웃음을 보고 우리가 전원일기에서 최불암에게 매료되었듯이, 수 많은 사람들이 장욱진의 순수함과 그것이 표현된 작품에 열광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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