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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영

전 HCN충북방송 대표이사

20년여 전 직장 선후배 기자 모임에서 한 노총각 선배가 좀 늦게 여자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노총각이라서 축하와 격려가 가득한 분위기였는데, 뜬금없이 내 입에서 나간 말이 "아직도 만나?"였다. '여자 친구가 있다면서 청첩장은 안 돌리고 아직도 만나기만 하면 어쩌누?' 라는 의도에선데, 막상 나온 말이 그랬다. 커플의 당황한 안색이 주변의 어색한 웃음 속에 가까스로 묻혔지만 난 미안함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워낙 여성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인 선배가 데려온 여성은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니, 어쩌면 비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변명과 사과를 딴엔 진심껏 늘어놓았지만 그 못난 신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흉터로 남아 있다.

누구나 밥풀을 흘릴 수 있듯 말실수도 피하기 어렵다. 말이 원래 불완전하기에 그렇고 사람의 말재주나 재치가 완벽할 수 없으니 그럴 게다. 예의나 배려심이 모자라도, 절제력이 부족해도 흔히 빚어지는 게 말실수다. 아니면 원래 무지해서 혹은 상황 정보가 없어서 저지르는 판단착오형도 많다. 입이 가벼운 사람, 매사 비판적인 사람, 특히 공인이라면 당연히 말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대중의 반향을 일으킬 정도라면 발화자의 책임은 조명받아 마땅하다.

말은 고등동물의 특권이요, 어떤 기적을 창조하거나 찬란한 문명사에 밑거름이 돼 왔던 반면에 재앙을 부르기도 했다.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는 동베를린 총서기의 여행자유화 조치 시점에 대한 말실수로 기적처럼 일어났다. 조선의 사화는 따지고 보면 말실수 때문에 일어났다. 김종직이 유자광을 간신이라고 공격하지 않았다면 무오사화가 안 일어났고, 임사홍이 술자리에서 입을 가벼이 놀리지 않았다면 갑자사화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재앙은 시대를 넘어 디지털세상에도 판친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면 칼춤 같은 댓글은 분명 실수하는 거다.

부적절한 표현부터 거짓말, 독설에 이르기까지 말실수는 다양하다. 말실수나 설화를 경계하라는 경구나 속담이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독일 속담에 "입을 열면 침묵보다 뛰어난 것을 말하라. 아니면 가만히 있는 게 낫다."라고 했다. 잠언 중에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후략)"라는 것이 있다.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는 법구경의 가르침, 불자의 묵언수행, 그 뜻을 알듯도 하다.

예절의 80%는 말로 이뤄지고, 정치의 80%도 말로 이뤄진다고 믿는다. 영업이든 교육이든 말로 이뤄지는 부분이 80% 이상이라 우긴들 이의를 달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만큼 말이 중요하기에 말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은 아무리 해도 지나칠 리 없을 것이다. 말재주꾼으로 통하는 모 인사가 같은 당 정치인에게서 "옳은 말도 싸가지없게 말한다"는 비아냥을 산 이야기는 유명하다. 참으로 정복하지 못할 게 말임을 실감케 하는 일화다.

요즘 정치권 이슈는 살펴보면 실수네, 트집이네 공방이 주류를 이룰 때가 많다. 대통령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 입양아 발언도 그렇고 전·현직 법무부장관의 부적절한 언사를 놓고 벌어지는 공격과 방어가 식상하다. 그래도 짚고 갈 이유는 있다. 여당 입장에서는 말꼬리를 잡는 야당의 공격을 그저 묵살하고 싶겠지만, 이는 기사 가치에 민감한 언론의 속성과 다를 게 없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다. 어떤 인물의 메시지는 그 사람이 누리는 영향력만큼이나 크기 때문에 빅 뉴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원내대표의 발언에 김대중 정부에서 파장이 컸던 '공업용 미싱' 발언이 소환된 모양인데, 아무튼 실수인지 전략인지 막말 행진은 멈출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고 말하는 게 중요하겠다. 그러려면 말이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로운 말은 예의와 상통한다. 예의는 상대를 배려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적절성 조건 3가지가 참고할 만하다. 사실에 기초한 진리성, 규범적 정당성, 표현의 진실성인데, 말을 할 때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수 뒤에 나온 해명과 변명은 거기서 거기다. 솔직하지 못한데 늘 당당한 모습이다. 겸허하게, 매끄럽게 넘어갈 수는 없는 걸까. 존 롤스는 정의 실천에 겸손을 다뤘다. 말이 겸손해지면 실수를 덜거나 덮고, 그러면 말이 정의로워질 수 있으리라.

새해는 말이 정의로워지는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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