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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완

충북문인협회장

 시골 들녘은 언제나 평화롭다. 가을 끝자락에 접어든 요즘 들판엔 온통 황금 물결이 넘실댄다. 내가 서 있는 내 앞에 논은 문전옥답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우리 가족을 보살펴온 은혜로운 삶의 터전이다. 이 논의 오랜 주인이셨던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벼들은 결실의 이삭을 내밀면서 생명력이 넘친다. 올 가을에도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이나 하는 것처럼….

 난 어릴 적 봄이 돼 이 논에 못자리판이 만들어지고 영농철이 시작되면 너무 싫었다. 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키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다. 농사지을 전답이 없는 이웃집 용선이는 노는데 나만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철부지 시절 짜증이 났다. 힘들여 일을 하시면서도 쑥쑥 자라는 벼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땐 헤아리지 못했다.

 농촌서 나고 자라면서도 벼가 수확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벼를 파종해서 흙과 물과 바람의 바탕아래 농부의 손길이 수없이 거쳐야 쌀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여덟 팔(八)자가 맞붙어져 쌀 미(米)자가 된 이치를 맨몸으로 부딪힌 아버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쌀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은 것은 고교시절이었다. 추운겨울 옆집 용선네 막내가 태어났다. 농사지을 변변한 땅이 없던 용선네는 용선 아버지가 날품을 팔아 일곱 식구 생계를 이어갔다.

 겨울이면 그마나 일거리가 없어 용선네 생활은 죽으로 근근이 연명할 정도였다. 막내를 낳은 용선이 어머니는 부은 얼굴로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자식들 먹을거리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린마음이지만 가슴이 아팠다.

 난 우리집 쌀독에서 쌀을 퍼다가 그 집 부엌에 몰래 갖다 놓았다. 그해 겨울 열 번 정도 그렇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용선네는 도시로 이사를 갔다. 얼마 후 고향에 다니러온 용선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를 잡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영문을 몰랐던 어머니는 그해 쌀독에 쌀이 줄어들었던 까닭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게 고구마도 좀 갖다 줬으면 큰애들도 먹었을 텐데… 하시며 자신이 못한 걸 자식인 내가 한데 대해 흐뭇해 하셨다.

 그 시절 쌀은 그토록 생명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런 쌀의 처지가 초라하게 급변했다. 가격은 국제수준보다 높지만 하락세다. 풍년에 의무 수입쌀 증가, 거기에 소비부진까지 겹치니 업친데 덮친 격이다. 창고에 묵은 쌀이 넘쳐 올해 쌀 재고량이 140만t이다. 적정량의 두배라 저장 비용도 엄청나다.

 함민복 시인은 '긍정적인 밥'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시한편에 3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따뜻한 밥이 된다/ 시집 한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하면 헐하다가 싶다가도/ 국밥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 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쌀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 기성세대에겐 그렇다. 쌀은 곧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고급승용차라도, 제아무리 비싼 보석이라도 한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단순한 이치로 생각하면 쌀 한톨 앞에 경건해진다. 때문에 농업은 언제나 오래된 미래이고 순수한 생명력이다.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기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흘린 땀은 땀이 아니라 피땀이다. 그 피땀의 결실을 사람들이 외면할 때 농부의 가슴엔 피눈물이 고인다. '일미칠근' 쌀 한 톨의 무게는 일곱 근이라는 말이 있다. 어릴 적 우리 어른들은 '밥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고도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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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