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산수'도 의외로 정치라는 외풍을 탔다.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영남학파, 즉 동인 계열의 인물이다. 조선전기에는 김일손, 퇴계 이황 등 영남학파 문인들이 사군산수를 주로 방문하고 작품으로 남겼다.그러나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충주목사를 역임한 이후로는 호서학파, 즉 서인들이 '사군산수'의 공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작품으로 남기게 된다.송시열 이후 사군산수 공간에는 권상하, 김창협, 김창흡, 김윤겸, 권섭, 권신응, 김광수, 홍중선, 이병연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범서인계 인물들로, 최종적으로는 노론 낙론계 인물이 사군산수의 공간 헤게모니를 장악했다.우암은 청풍관아의 '팔영루'(八詠樓)와 수제자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머물고 있던 '수일암'(守一菴)의 편액을 썼다. 이것이 계기가 돼 팔영루와 수일암은 서인계 문인들의 필수 답사코스로 발전했다. 특히 경기도 지역의 서인계 문인들이 남한강 수계를 이용해 사군산수를 많이 찾았다. 이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진경산수화로서 사군산수를 많이 그리는 주요 이유가 됐다. 앞서 김창협(金昌協·1651-1708)과 김창흡(
우리고장 북부지역 '사군산수'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킨 인물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었다. 이황은 단양서 가까운 지금의 경북 풍기 출신으로, 우리고장 사군산수에 반해 단양군수를 자청할 정도였다. 17세기 인물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지은 '단양산수속기후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구담으로 들어서니 오로, 현학, 채운, 옥순 등 여러 봉우리들이 보였다. 이것 모두 퇴계선생이 새롭게 작명한 것이다."(又一轉而入于龜潭。如五老,玄鶴,彩雲,玉筍諸峯。皆退溪先生命名而新之者。) 이중 지명 옥순봉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매우 자주 거론되면서 대중성을 지니게 됐다. 그 전 지명은 '귀머거리 聾'(농) 자를 쓴 '농암'이었다. 제천의 '금수산'도 퇴계 이황이 작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양군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본래 이름은 백암산이었으나, 1548년 퇴계 이황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금수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전까지 사군산수에는 불교식 지명이 많이 존재했다. 이후 사림파가 사군산수의 공간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대거 '비불교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단양읍 단성면 가산리와 대잠리 일대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상선
조선시대 단양, 청풍, 영춘, 제천 등 4개 군현의 산수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뜻에서 '사군산수'(四郡山水)로 불렸다. 비교적 풍부한 수량과 기이한 석벽 그리고 계곡·강 주변의 반석 등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만들고 있다. 불우했지만 자족(自足)의 마음으로 살았던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사군산수'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했다. '영춘·단양·청풍·제천 네 고을은 비록 충청도 지역이지만 사실은 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다. 두메 가운데 강을 따라 석벽과 반석이 많다. 그 중에도 단양이 첫째로 고을이 모두 만첩산중에 있다. 10리 되는 들판은 없으나 강과 시내, 바위와 골(동굴 지칭)의 훌륭한 경치가 있다.'- 문헌상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인물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었다. 그는 1602년 충청도 경시관(京試官·일종의 시험 감독관)으로 부임했을 때 단양의 구담, 도담 등을 유람한 후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역하면 이렇다. '사군은 산수의 본향이다. 그중에 구담의 경치가 최고인데 모나게 우뚝선 옥순봉과는 급하고 가파르게 달려 서로 잇닿아 있다. 그 아래로는 흐르는 물이 돌아나가고 거센 여울 맑으니 또한 옥이로다.'- 필자의 어설픈 의역
선거벽보에는 후보자의 얼굴 모습, 정당의 상징색, 글자의 크기, 활자체 등 여러 요소들이 표현된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선거벽보를 가리켜 '종합예술의 미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 경우 소속정당의 인기가 높으면 정당 표기를 크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늉만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선, 총선, 지방선거 등 모든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슬로건'이다. 정치학자들은 곧잘 선거 때의 슬로건을 '호루라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호루라기는 음성 메시지를 통해 동일의식을 지닌 사람을 불러 모은다. 피아를 구분하면서 더 많은 같은 편의 사람들을 한 구호 아래로 모이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 일부 선거 전문가들은 "좋은 슬로건 하나는 1백분의 연설이나 천명의 선거운동원보다 낫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때문에 선거 때의 슬로건은 일종의 정치광고이기 때문에 짧고, 명확하며, 그리고 기억하기 좋고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난 대선(2009년) 때의 슬로건은 'Yes, We can'(그래 우리 할 수 있다'였고, 재선 성공 때의 구호는 'Forward'(앞으로)였다. 한국 정치사도 대선은 물론 충북을 포함한 이
'바람도 쉬여 넘난 고개 구름이라도 쉬여 넘난 고개 /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래매 쉬여 넘난 고봉 장성령 고개 / 그너머 님이 왓다하면 나난 한 번도 쉬어 넘어가리라.'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사설시조의 하나로, 작자는 미상이다. 시조 중장에 등장하는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래매는 모두 매에 관한 표현들로, 보래매는 보라매의 옛이름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매 종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해주목과 백령진에 매가 많이 나고 전국에서 제일이다. 매는 그 해에 나서 길들여진 것을 보라매하고 하고 야생으로 여러 해 된 것은 '산진이'라 한다. 집에 있으면서 여러 해 된 것은 '수진이'라 하며, 흰 것을 '송골'(松·), 청색인 것을 '해동청(海東靑)이라 한다.' 조선 숙종~영조 때 인물인 강재항(姜再恒, 1689~1756)도 양응자설(養鷹者說)이라는 매와 관련된 문헌을 남겼다. 먼저 이 글은 매사육 방법을 체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매를 날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날아서 바람을 맞으면 그 기운이 바야흐로 솟아나서 스스로 멈출 수가 없지. 한번 날면 자유자재로 날게 되고 세 번 날면 구속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온달동굴은 4억5천년 전부터 생성되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동굴내 공간은 지금도 계속 퇴적변화가 진행되고 있고 전체 길이 1천5백20m 중 4백50m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온달동굴은 조선시대에는 석굴(石窟)로 많이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성산 아래에 석굴이 있는데 높이가 11척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쯤 되며 깊숙히 들어가 끝이 없고 물이 철철 나와 깊이가 무릎에 닿는데 맑고 차갑기가 얼음과 같다. 고을 사람이 횃불 10자루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구멍은 오히려 끝나지 않았는데 횃불이 다되어 돌아왔다.' 이밖에 해동지도에는 '남굴'(南窟)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남굴은 남한강의 남쪽에 있는 굴이라는 뜻이다. 조선 정조 때의 인물인 '신광하'(申光河·1729~1796)는 온달동굴을 직접 체험한 후 '사군록'(四郡錄)이라는 기행문을 썼다. '사군'은 제천, 단양, 청풍, 영춘현 등을 일컫는다. 그는 영춘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아래 강에서부터 배를 끌고 강을 통하여 가시오. 짐을 짊어지고 비탈길을 지나서 굴입구에 이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개 굴속은 물이 깊어 길로
성내 시설의 하나인 집수지(集水池)는 인위적으로 물을 모은다는 점에서 샘, 우물, 연못과는 구분되고 있다. 다만 지표수를 모으는가, 아니면 지하수를 집수하는가는 구분이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지표수만을 모으려고 만들었지만 그 벽면이나 바닥에서 지하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축(石築)한 것만을 집수지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성내 집수지는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이후 6-7세기에 가장 많이 축조했고, 8세기 이후는 산성축조 기술의 변화로 급격히 감소했다. (재)울산문화재연구원 황대일 씨가 최근 '야외 고고학' 제 19호를 통해 '고대 산성내 석축집수지의 구조와 변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지금까지 발굴된 전국 25개 산성의 집수지를 대상으로 위치·형태·석축쌓는 유형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34기(85%)는 계곡, 4기(10%)는 구릉사면, 2기(5%)는 구릉 정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수지의 형태는 방형이 14기(35%), 장방형 12기(30%), 원형 역시 12기(30%), 타원형 2기(5%) 2기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석축을 쌓은 유형은 직선형 20기(53%), 계단형 6기(18%), 사선형 12기(29%) 등
청주 부모산(232m) 정상 부근에 '모유정'(母乳井)이라는 우물이 위치하고 있다. 하부 직경 1m 크기의 모유정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의 젖과 같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물과 관련해 임진왜란과 몽골침입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920년대 동아일보가 부모산 모유정 전설을 소개했다. '피란민들이 실컷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 본즉 그 앞에 놓여 있는 돌틈에서 천만 뜻밖에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신기한 일을 본 백성들은 "이것은 필시 천지신령이 우리를 불쌍히 굽어 살피사 우리에게 생명수르 내리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 즉시 그곳을 넓게 파고서 제법 버젓한 샘을 꾸미여 놓고보니 생명천 가치를 가지게 되었드랍니다.(…) 그리하여 그후부터 이 산을 아양산(阿孃山)이라고도 하며 부모산(父母山)이라고도 불러왔다 합니다.'- 인용문 중의 피란민은 임진왜란 때의 난민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란 당시 청주 부모산에서 왜군과 전투가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전설은 임진왜란이 아닌, 몽골 침입을 역사적 배경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한말 청주지역 유림의 한 명으로 박노중(朴魯重·사진)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그의 본관은
산 정상부 경사면에서 삼국시대 대형 집수지(集水池)가 발견되면서 청주 부모산(282m)이 새삼 지역민의 주목을 받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고을의 지세를 진산(眞山)-물길-안산(案山)의 모습으로 파악한다. 진산 앞에 물길이 있기 때문에 '배산임수'라는 표현이 나왔다. 또 진산을 무릎꿇은 모습으로 마중하는 산이 '안산'이다. 따라서 안산은 진산과 마주 보는 방향에 위치하고, 또 위계가 낮기 때문에 진산보다는 낮다. 그래서 '책상 案'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부모산이 청주의 안산인지는 다소 불확실하다. 진산인 우암산은 무심천에 가깝게 위치하는 편이나 마중하는 산인 부모산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혹자는 부모산보다 구KBS청주총국 뒷산을 청주의 안산으로 보기도 한다. 부모산(父母山)은 독특한 지명이 인상적이다. 전국의 산중 '父母'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 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산' 또는 '부모성'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530년(중종 25) 이행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하기 위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청주목 고적조에서 부모성(父母城)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사진 참조)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
전통시대부터 존재하던 속리산 법주사의 금속제 미륵대불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반출됐고, 이후 일대는 1939년까지 약 70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잡초만 우거진 채로 방치됐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손을 맞잡은 사람이 전북 태인 출신의 갑부인 가산(嘉山) 김수곤(金水坤)과 당시 법주사 주지 석상스님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배불정치에 크게 분개했다. '당시의 주지 장석상씨는 대원군의 배불정치로 불상이 뜯겨 역사상 큰 오점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에 일치, 바로 그 자리에서 김씨의 사재로 미륵불을 더욱 크게 세우기로 했다. 조각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김복진씨에 의해 높이 80자의 콘크리트 불상 건립에 착수했다.'- 가산이 미륵대불 불사금으로 내놓은 사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1960년대 발간된 경향신문은 밝히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콘크리트 시멘트불이 낙성되자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의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김수곤 씨의 특지로 경비 약 3만원을 들였다'라고 김수곤이 희사한 불사금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우리나라 화폐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하의 소(牛) 가격은 '70원'
법주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전통불교 여러 종파 중 법상종(法相宗)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법상종은 이른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사상(彌勒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륵사상은 부처의 후신불이 미륵불이 어느 시점에서 도솔천에서 하생,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한다는 이론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로 치면 일종의 메시아 사상이다. 그러나 하생이라고 해서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 온다고 불교는 말하고 있다. 법주사 경내에는 국보 제 64호인 석연지(石蓮池)가 위치하고 있다. 이 '석연지'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돌에 연꽃을 새진 연못' 정도가 된다. 바로 석연지는 '도솔천의 미륵불이 빨리 하생, 연못(池)을 통해 출현하라'는 상징적인 염원을 담은 조형물이다. 그렇다면 법주사 미륵불과 석연지는 같은 사상을 표현한, 미래의 구원을 염원하는 조형물이 된다. 이처럼 법주사는 창건 초기부터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법주사가 동제 대륵대불-청동미륵대불-금동미륵대불 등 미륵불을 줄곧 세우려 한 이유
속리산 법주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은 팔상전(국보 제 55호)과 미륵대불이다. 팔상전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목탑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의 요청으로 1624년(인조 2)에 재건됐다.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기 때문에 불교를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기의 승려들은 호국사상으로 무장, 전국 곳곳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따라서 임진 직후의 조선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계의 요청을 일시적으로 수용,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불사(佛事)가 많이 일어났다. 법주사 팔상전도 그런 배경하에 건립됐다. 이에 비해 법주사의 또다른 상징물인 미륵대불은 시간적으로 전통과 현대에 걸쳐 있는 묘한 조형물이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동불(銅佛)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건립과는 과정에서 일주문 밖으로 반출, 당백전을 주조하는데 사용됐다. 법주사 미륵대불이 동불이자 실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17세기 선비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지은 '산중일기'에 잘 드러난다. "말을 달려올라 가보니, 법주사가 수정봉 아래에 있었다. 지대가 평평하였다. 제3문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7,8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