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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시인·수필가

햇살이 쏟아지던 어느 봄 날, 나즈막한 산길을 걷는다. 그곳은 공기의 맛과 바람 냄새가 다르다.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산만큼 아늑한 기쁨을 주는 곳이 드물다. 나에게 이곳은 세상살이를 헛되지않게 살려는 보람의 순간을 제공한다.

산기슭을 천천히 걷노라면 나무들이 이파리를 움 틔우기위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흙속의 무수한 씨앗들이 먼저 나가려고 부산을 떠는듯한 모습도 생명의 원초적인 활력이다.

4월에 어쩌다 눈이 와도 꼭 봄은 오고야 만다. 땅속 어디쯤에서 지열을 끌어올렸기에 쌓인 눈을 녹여버린 것일까? 날씨의 변덕도 자연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이 없다. 모든 식물들은 기온만 적당해지면 한시도 그냥 있으려 하지않고 여기서 저기서 푸르름을 내뿜는다.

맨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이가 있는게 눈에 띄었다. 딱딱한 흙에서 균열을 일으키다니, 어찌 아무런 도움의 손길없이 그런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고작 연약한 풀인데 굳은 땅을 그렇게 갈라 놓은것이다. 그틈으로 여린 파란 새싹이 보였다.

양광을 받아 무리지어 수줍은 듯 피어있는 할미꽃을 발견했다. 겸손하게 말이 없는 그 꽃들 앞에서 나는 수다쟁이처럼 말을 붙인다.

'너는 왜 고개를 숙이고있니? 세상이 부끄러운게야? 왜 아직 다른 꽃들은 피어나지 않는걸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옆에 제비꽃이 마치 시샘이라도하 듯 보랏빛 꽃망울을 촘촘히 매달고있다. 나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이곳저곳 자세히 살펴보니 이름모를 작은 들꽃들이 얼굴을 내밀며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른 풀들도 황토 흙바닥에 깊이깊이 뿌리를 내렸다. 햇빛을 맘껏 누리며 땅 밑에서 솟아 오르는 파릇하고 씩씩한 녹색들을 바라보자 새로운 힘이 솟았다.

산길 작은 오솔길을 바라본다.

햇살을 즐기던 풀꽃들이 웃으며 꽃 피울날을 꿈꾼다. 머지않아 활짝 예쁜 꽃을 피울 것이다.

가로수들도 이파리를 여기저기에서 움을 틔우고있다. 봄빛이 피어나는 그곳에, 햇빛을 정답게 나눠 가지며 꽃망울을 터트리려 준비중이다

산길에서 내려와 마을길을 걷는다. 모란이 활짝 꽃을 피웠다. 얼마 전 꽃들은 초록 넓은 이파리로 가슴에 푸른 희망을 불어 넣어 주더니 지금은 꽃을 피워 눈을 호강시켜 주고 있다. '어찌 소리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메말랐던 가지에서 저토록 예쁜 꽃을 피워내다니… 저 빛깔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나는 그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자리를 떠나지않았다.

봄이 찾아온 마을길에 느티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면 자목련꽃이 보랏빛 얼굴을 내민다. 봄 향기가 '아롱아롱' 들숨으로 들어와 내 맘을 홀렸던 초봄은, 언제나 순간에 지나가버린다.

자칫 인생이 지루해지기 쉬운 나이에 봄길은 내게 눈으로 보는 기쁨과 행복을 제공해준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따라가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한순간 생이 더욱 극진해지는 것 같다.

샛강 옆길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심어놓은 꽃길이있다. 꽃밭으로 글씨를 만들어 놓았다. "웃음이 피어나는 소이" 황새 몇마리가 무리지어 푸른 하늘을 비상한다. 봄빛을 받으면서 즐거웠던 오늘 하루가 지나간다.

어느새 오늘도 해가 서산에 기울어 하루를 서두르는 시간, 뚝방길에 고개숙인 노을이 침묵할 때 쯤 나는 지친 심신을 내려 놓는다. 모든 소리가 잠든 저녘 툇마루에서 초저녁 별을 맞고, 그 고요함 속에 덧없는 한가로움을 얻는다.

나는 이런 사소한 일에서 잔잔한 기쁨을 얻어내고 정성을 기울인다. 또한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란 자연과 함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시골에 내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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