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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보영

충북여성문인협회장

사과 맛이 상큼하면서도 달콤하다. 한입 베어 무니 부드러운 과육이 주는 식감과 입안 가득 달고 시원한 물이 넘쳐나 맛을 더해준다. 며칠 전만 해도 육질이 억세고 향기도 덜 한 듯해 너무 일찍 한꺼번에 많이 산 것은 아닌가 싶어 후회스러웠는데 맛이 잘 들어 그런대로 먹을 만 해 진 것 같아 다행이다.

얼마 전 갈바람의 수런거림에 이끌려 길을 나섰다가 사과밭 하나 가득 출렁이는 붉은 물결에 마음을 빼앗겨 때가 좀 이른 줄 알면서도 산 사과다. 늦가을에 수확하는 부사는 된서리를 함빡 맞아 결이 삭아야 제맛을 내는 줄 알면서도 붉게 익어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갈바람에 일렁이는 사과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버린 것이다. 쓸데없이 입맛만 까다로운 내가 머뭇거리면서도 사게 된 것은 사과밭 주인의 한마디 때문이다. 이미 다 익었기 때문에 지금 따서 시원한 곳에 냉장을 시키면 서리를 맞으며 숙성된 부사 본래의 맛을 낸다고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보관했더니 제물에 숙성된 맛에는 조금 떨어지는 것 같지만 억세었던 육질도 부드러워지고 맛도 한결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역시 결이 삭아야 제맛이 나는가 보다.

어머니의 장독대는 정갈했다. 크고 작은 것들이 모여 있어 오밀조밀 정다웠다. 장독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 식구들이 넉넉히 먹고도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네모 반듯한 장독대 가장자리에는 키가 작은 꽃들이 피어 있어 고왔다. 한여름이면 바닥을 돋운 다음 얇고 편편한 돌을 깔아 만든 틈 사이사이로 채송화가 곱게 피었고, 장마가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고추잠자리들이 장독대 주변을 날기 시작하면 맨드라미가 피기 시작해 가을이 깊어져 서리가 내릴 때까지 붉은빛을 더해갔다.

그곳은 어머니의 놀이터였다. 바느질하실 때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외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작은 항아리에 남아 있는 오래된 간장에다 새로 담은 햇간장을 떠 붓는 다던가, 이웃에서 두부라도 하는 날이면 두부판에 순두부를 가두고 눌러놓아 생긴 순물을 가져다 묵은 된장에 섞기도 하셨다. 언젠가는 그런 어머니에게 새로 담은 된장이 빛깔도 곱고 맛있어 보이는데 왜 묵은 간장이나 묵은 된장을 그리 아끼느냐고 묻는 내게 오래된 것은 결이 삭아져서 약이 될 수 있지만, 햇것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셨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고가구점이나 헌책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뭇 기웃거리는 버릇이 있다. 퀴퀴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그 냄새 때문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고가구점이나 헌책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뭇 기웃거리는 버릇이 있다. 퀴퀴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그 냄새 때문이다. 그들이 살아 낸 세월을 말해 주듯 모서리에 상처가 나고 반질반질 손때가 묻어 있는 낡은 반닫이에서, 세월의 더께를 훈장처럼 받아 안고 누렇게 변색된 채 수북이 쌓여 있는 오래된 책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한 생을 살아 냈을 누군가의 곰삭은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서다.

특별한 장식도 없는 평범한 반닫이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의 품새로 보아 대갓집 안방에 한 자리를 차고앉아 귀중한 문서 보따리를 품지는 않았을 것 같고, 작은 토담집 안방에 머물면서 허름한 무명 옷가지 몇 벌쯤을 품고 바지런한 주인의 발소리를 노랫가락처럼 여기며 살아냈으리라.

귀퉁이가 헤진 채 누런 곰팡이로 뒤덮인 책들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한 자리에 붉고 푸른 밑줄이 여러 번 그어진 곳에 눈길이 머물기도 한다. 반갑고 정겹고 아프다,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 그의 옛 주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서다. 그들이 토해내는 낡고 오래된 향기 속에서 삭여내지 않고는 그 무엇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이 삭는다는 것, 곰삭아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는 본래의 성품이 세월 속에 녹아들어 숙성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 더욱 깊은 맛으로 다시 빚어지는 것 일게다.

한 알의 잘 익은 사과라도 된서리를 맞으며 찬바람을 견뎌내야 비로소 제맛을 낼 수 있듯이, 오래된 장이라야 짠 잣이 사라져 단맛을 내고 약이 되듯이, 세상 살아가기도 부딪쳐 깨어지고 울고 웃기도 하며 곰삭아져야 제맛을 낼 수 있는 것 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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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