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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라

청주 청원초 교사

1년의 교실 살이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은 아이들이 자신의 책을 만드는 순간이다. 다양한 그림책을 마주하며 그 그림책의 주인공을 예시 삼아 '나라면 어땠을까?' 패러디 그림책을 꾸준히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작 그림책에 대한 욕구가 자라난다. 충분히 연습이 되었을 때 창작 그림책을 만들자고 제안하는데 설레는 마음과는 다르게 막상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렵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책의 시작, 어떤 내용을 담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제목을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으면 된다'는 간단한 문장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어떻게 설명할까 적절한 그림책이 없나 살피던 차에 좋은 그림책 한 권이 번역돼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책, 레미 쿠르종, 주니어RHK>.

그림책 속 주인공 알리시아는 할아버지에게 책을 한 권 선물 받는다. 그런데 그 책에는 아무것도 없다. 제목도, 내용도 없이 깨끗이 빈 책. 그런데 할아버지는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마법 책이라고 말한다. 책을 받아들고 고민하는 알리시아의 모습이나 무엇을 써야 할지 깨닫고 써 내려가는 장면, 그 후의 이야기가 딱 우리 반 아이들이 창작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이 그림책과 함께라면 그림책 창작을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수업을 준비했다.

알리시아가 할아버지에게 책을 받는 장면까지 읽고 나도 아이들 앞에 빈 책 한 권씩을 놓았다. "여러분, 이건 마법 책이랍니다. 여러분도 알리시아처럼 마법의 책을 한 권씩 선물 받은 거예요." 아이들의 눈빛에 설렘이 가득했다. 이제 무엇을 그 안에 담아야 할지 알기 위해 책의 뒷부분을 읽었다. 알리시아는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다 책에 담길 자신의 이야기를 깨달았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책을 가져가거나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책을 펼쳐놓아 보는 시도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아무것도 없는 책>을 들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법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의 책상에서 답을 찾았고, 어떤 아이는 유튜브 속에서 답을 찾기도 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떠올라 머리를 움켜쥔 녀석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확고한 녀석은 벌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책 한 권의 힘이 이토록 강력하다. 그림책 창작이 주는 무게를 덜어줄 수가 없어 늘 고민이었는데, 책 속에 담긴 알리시아의 질문과 걱정 덕에 아이들은 나도 언젠가는 내 그림책의 이야기를 찾겠지 생각하며 아무것도 없는 마법 책을 들고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의 활동을 핑계 삼아 나도 아무것도 없는 책 한 권을 펼쳐두고 생각에 빠진다. 이제 겨우 내 이름만 적은 책. 내가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 걸까 계속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무것도 없는 책이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아마 아이들도 지금 내가 경험하는 이 과정을 경험하고 있겠지. 아이들의 책이 벌써 기대된다.

누구나 마음에 자신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니·'라고 물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에너지를 쏟고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내느라, 나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슨 이야기가 속에 있는지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아무것도 없는 책>을 마주해보자. 꼭 책을 만들지 않아도 좋다. 그저 비어 있는 책을 보며 나에게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것도 없기에, 내 마음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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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