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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습득도(拾得圖)’

민중의 고된 삶 고스란히 담아

  • 웹출고시간2008.07.02 19:52:1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남과 북이라는 국토의 분단이 가져온 지독한 앙금은 우리 사람들의 삶 뿐 아니라 문학이나 미술, 연극 등 모든 예술장르 곳곳에 잠복해 있다 언제 어느 때고 답답한 복병으로 드러나곤 한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아 한 미술가는 남이냐 북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돌연 북을 택했다.

그로인해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의 그림을 오래된 자료집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임군홍(1912~ ?)이 그다.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그림 중 마치 그의 삶을 미리 예측하기라도 한 듯한 그림 ‘행려’(1940년 대)를 보고 가슴에 울컥하는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일제강점기시절 만주에서 생활하다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 ‘행려’는 추운 겨울 거리를 방황하는 중년 남자의 처절한 모습을 담고 있다.

황갈색조의 거친 나이프자국으로 삶의 무게를 강하게 투영한 이 유화그림을 보면 당시 조국을 떠나 방황하던 많은 조선인들의 고달픈 삶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치 그림속의 고통이 그 시절로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까지 곁들어진 그런 느낌말이다.

그림을 그린 임군홍이 해방 후 해방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고 이념적인 대립 앞에서 갈등하다 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의 삶을 예측했던 그림 ‘행려’. 이렇듯 뜻하지 않게 그림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이, 비정하도록 슬픈 삶이 엿보이기도 한다.

김홍도 '도담삼봉도(島潭三峰圖)'

1796년작, 종이에 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임군홍의 ‘행려’가 우리들 삶 가까이 존재했다면 200여 년 전에는 단원 김홍도(1745~1805년 이후 미정)의 ‘습득도(拾得圖)’가 있었다.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김홍도는 가히 신적인 존재다. 그의 그림을 논한 많은 평론집에서 ‘그림의 혁명’이나 ‘최고의 경지’니, ‘조선 풍속화의 절정’이니 하는 표현들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그만큼 그가 우리 미술사에 남긴 업적이란 이렇듯 미진한 문장으로 열거할 수 없을 뿐이다.

김홍도의 그림을 떠올리면 교과서에 많이 등장하는 ‘시장풍경’이나 ‘씨름’, ‘서당’ ‘농부’ 등 민중들의 삶을 알 수 있는 풍속화를 필두로 궁중 기록화나 임금의 어진, 자연의 풍경, 불교의 탱화, 영묘화 까지. 그 그림의 다양성 또한 무궁무진하며 많은 작품들이 현존해 현대인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와 있다.

그래서 일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김홍도는 그저 독보적인 조선시대 화가이며 이것을 인정받아 중인 출신으로 충북 괴산군 연풍의 현감을 지낸 운 좋은 예인이라는 정도다. 그가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하고 늙고 병들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만년에 지극히 불우한 삶을 산 예인이고,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은 잊고 있다.

김홍도 ‘습득도(拾得圖)’

비단에 담채, 21.5x 15.2cm, 조선(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단순한 구도이면서 먹의 농담으로, 세상을 떠돌며 백성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었다는 고승 습득의 삶을 표현한 그림이다. 단원의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김홍도 만년의 삶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작품 ‘습득도’가 그래서 임군홍의 ‘행려’만큼이나 가슴 저릿하게 다가온 것이다. 습득은 당나라 때의 천태산 국청사 선승이다. 스승인 풍간이 주워다 키웠다 하여 습득이라 한다는데, 이 습득은 거지 짓을 하며 가난한 민중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습득도’는 대략 이렇다. 한 길에 거지 차림의 남자가 주저앉아 있다. 이 남자는 검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고 다 헤진 짚신을 신고 있다. 옆에 무엇이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은 가벼운 봇짐이 있고 지팡이가 있다. 앞쪽은 이마가 벗겨지고 뒤통수만 삐죽삐죽 짧은 머리카락이 솟아 있다. 이것으로 보아 머리조차 제대로 깎지 못한 거리의 중임을 알 수 있다. 불룩하게 솟은 어깨와 꾸부정한 등이 도드라진 뒷모습이 길을 가다 지쳐 잠시 쪼그리고 앉아 쉬고 있는 고승이다. 그럼에도 쉬고 있는 뒷모습조차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배고픈 백성들이 많고, 육신은 병들어 가고, 그려야할 그림은 가슴에서 자꾸만 치솟아 오르고 하는 단원 자신을 닮았기 때문일까.

김홍도가 만년에 왜 이 승려 ‘습득’을 그렸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삶의 여정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김홍도는 정조의 지극한 총애로 정조 15년 47세에 종 6품인 현감자리에 오른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행정관으로서의 능력보다는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애정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리에서 민중들의 삶과 그들의 애환을 그림에 담고자 했던 단원으로서는 관직이라는 것이 옷에 맞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5년 만에 그의 정령(政令)이 해괴하다는 보고가 올라가 현감자리에서 해임된다. 그럼에도 정조의 각별한 관심은 지속되어 ‘오륜행실도’ 등 나랏일과 관련된 그림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단원유묵(檀園遺墨)’에 남아 있는 단원의 만년 시문과 편지를 보면 세상살이에 실망하고 회의에 빠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옆집 사람 돈 많다고 근심이 없을 소냐, 저집 노부(老夫) 가난해도 즐거움이 넘치도다, 백주(白酒)를 무르익혀 좋은 친구를 맞는 구나......’ ‘입을 다물어 세상일을 말하지 않는다, 유희를 때로 거문고에 실을 뿐’ 이라는 등의 문장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단원이 만년에 속세를 떠나 고독하게 세상을 살았음을 알수 있다.

단원의 편지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54세에 병이 들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으며 환갑 무렵에는 천식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원의 고달픈 삶을 증언하는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단원은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매화를 팔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히 기한 것이나 돈이 없어 살수가 없던 차에, 마침 누가 돈 삼천을 가져와 그림을 그려달라기에 이천으로 매화를 사고 팔백으로 술 몇 말을 사서 동호인을 모아 매화음을 하였으며, 겨우 이백으로 쌀과 나무 값을 하였으니, 일일의 계(計)도 아니 되었다. 그 소광(疎曠)하기가 이러하다’(‘호산외사’의 단원전)고 전해진다.

김홍도 '씨름도'

종이에 담채, 27cm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처럼 그의 화려한 명성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하고 가난한 예인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다룬 풍속화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그렸던 그림과 다르게 단순하면서도 그림의 깊은 맛이 나고, 그의 생활 철학이 느껴지는 그림 ‘습득도’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은 그림에서 그의 삶이 온전히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가 만년에 어떻게 살았을까를 예측해볼 수 있는 그림 ‘습득도’는 대담한 묵법과 통쾌하고 신속한 필선으로 동양회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그림이다. 중국이나 조선의 몇몇 화가들이 ‘습득’을 소재로 그림을 남겼다고 하지만 단원의 이 ‘습득도’만큼 회화적인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 없다는 게 평단의 평가다.

이러한 평단의 평가를 떠나 이 시대에, 삶이 고달프고 어깨의 짐이 무거운 사람이라면 속세를 떠나 행려자가 되거나, 혹은 방랑자가 되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화가의 눈에 이러한 모습이 빗겨갈리 없을 것이다. 무엇으로 채워도 허기진, 허허로운 예인의 정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림 ‘습득도’다. 아직도 배곯는 백성이 많다는데, 어디 거지 짓을 하며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주는 어진 스님이 나타나주지 않으려나?


/김정애 (프리랜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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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