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은 보위에 무사히 오르자 그 고마움으로 74명의 공신을 선정했다. 이른바 좌리공신(佐理功臣)이다. 1등은 신숙주·한명회 등 9명, 4등은 황효원·김순온 등 45명이었다. 이중 황효원(黃孝源·1414∼1481)에 대한 인물평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는 형조참판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인 1460년의 일이다. 이때 황효원은 우리고장을 매우 잘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내가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몸받아서 마음을 다하여 어루만지며 사랑하여 선정의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민(吏民)이 상서하여 경을 남겨두기를 청하므로 내가 실로 은혜를 가상히 여겨 민정을 어기지 않고 경을 그곳에 남겨두겠다."'- 임기가 다 되어 이임을 해야 하나 도민들의 간청에 의해 충청감사로 다시 남겨두겠다는 뜻이다. 세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효심'까지도 배려를 한다. 그는 충청도에서 가까운 경상도 상주 인물이었다. '경(卿)은 비록 늙은 어미가 있지마는 길이 멀지 않으므로 경(卿)이 마음대로 내왕하면서 서로 만나도록 할 것이니, 더욱 힘써서 공(功)을 나타내도록 하라"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사관(史官)이 됐고, 이때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일어난 것이 조선시대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다. 김종직은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 세조를, 의제(초나라 회왕)를 죽인 항우(項羽·bc232~202)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했다. 스승 김종직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됐고, 사관 김일손은 "파당을 만들고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로 연산군에 의해 능지처참됐다. 김일손은 성격이 강한 것으로 구전되나 낭만적인 모습도 많이 발견된다. 그가 우리고장 남한강 물길을 따라 내륙여행에 나섰다. '한 고개를 넘어 단양 지경에 들어서면 장회원이 된다. 그 아래에서 말고삐를 늦추면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가는데, 홀연히 쌓인 돌무더기가 우뚝 솟고 총총한 봉우리가 첩첩이 푸르러 좌우가 아득하고 동서로 현혹되어 아무리 교력(巧歷)이라도 셀 수가 없다.'- 장회원은 지금의 장회루를 말한다. 이곳에 서면 구담봉, 옥순봉, 단구협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담봉은 기암이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옥순봉은 희고 푸른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올라 마치 죽순과 같다하여 불여진 이름이다. 단구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매일 임금의 거둥이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기록했다. 바로 사초(史草)다. 사관들은 이 사초를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었고, 그해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을 보고했다. 이렇게 사초가 책으로 묶어진 것은 시정기(時政記)라고 불렀다. 비밀을 생명으로 하는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초사료로 사용됐다. 종이는 펄프가 나오기 전까지 귀한 존재였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이 편찬돼 제구실이 끝난 사초는 세초(洗草)라고 해서 물에 빨아 먹물을 뺀 후 다시 사용됐다.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사초를 보고 싶어했다. 우리나라 역대왕 중 최고의 성군은 단연 세종대왕이다. 그는 인품이나 능력면에서 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인간인 이상 사초를 무척 보고 싶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당시 몇몇 대신들이 "어떠한 경우든 사초만은 안된다"고 버텼고, 세종은 짜증섞인 반응을 보인다. "지금 친히 관람하고자 하는 것은 착하고 악한 행실의 자취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년의 왕위에 오를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몰래 서로 이야기한 말을 대부분 사신(史臣)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인상여(印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인상여의 다음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는 구슬을 무사히 조나라로 도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서 '완벽귀조'라는 표현이 생겨났고, 그 준말이 '완벽'이다.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와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로 이순몽을 소개했다. 그는 친구 황상(黃象)의 애첩인 월하봉이라는 기생과 사통했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 월하봉의 머리가 빡빡 깎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상이 이를 알고 반인(伴人)과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가서 순몽과 월하봉을 잡고 모두 그 머리를 바싹 깎았으므로, 명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상종(類類相從) 중에 친구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 친구의 그 친구'라는 표현이다. 이순몽의 친구 황상에게도 궁금증의 시선이 쏠린다. 황상 역시 무신 출신이다. 그는 세종 연간에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휘하의 중군장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도 친구 이순몽과 마찬가지로 '육봉'(肉棒)을 잘못 휘둘러 망신을 당하게 된다. 가뭄이 크게 들자 태종이 전국적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황상이 이를 어겼다. 그것도 기생까지 끼고 술을 마시다 관원에게 적발됐다. '전 소감 황상을 영흥부로 귀양보내었다. 이때에 크게 가물어서 금주령이 엄하였는데, 황상이 의순고별좌로서 주모(酒母)의 집에 들어가 기생을 대하고 술을 마시다가 헌부(憲府)에 적발되었다.'- 유배형이
조선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은 경주 등 전국 5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종 연간에 이를 보수하기 위한 작업이 한양에서 실시됐다. 이때 영남대로를 따라 올라온 경주의 어진이 우리고장 충주에 일정기간 머물게 된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임금의 초상화는 매우 극진하게 다뤄졌다. 특히 창업자 이성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당시 조정은 어진을 안전하게 운송할 중앙 고위관료를 전국에 파견했다. 이때 경주에 파견돼 충주까지 올라온 인물이 판중주원사 이순몽(李順蒙·1386∼1449)이었다.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을 경주에, 예조 판서 김종서(金宗瑞)를 전주(全州)에 보내어 태조(太祖)의 쉬용을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으니, 이는 장차 고쳐 그리기 위함이었다.'- 판중추원사는 귀에 익숙치 않은 관직명이지만 품계가 꽤나 높았다. 조선전기에는 정이품이었으나,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이순몽은 무신 출신으로 남으로는 대마도, 북으로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가는 곳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따라서 태종과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 이응(李膺·1365∼1414)이 좌명공신에 오른 점도 크게
제천 청풍면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진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의 본채 외에 날개 건물인 '익랑'(翼廊)을 거느리고 있다. 한벽루의 역사는 의외로 깊어 고려시대에 처음 신축됐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고려시대 청풍은 '군'(郡)이 아닌 '현'(縣)이었다. 중앙 관료가 직접 파견되지 않고 이웃 수령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청풍현 출신인 '청공'이라는 스님이 왕의 스승, 즉 왕사가 됐다. 제 27대 충숙왕(忠肅王·1294~1339) 때의 일이다. 청풍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누각으로, 이때 행정 지위도 '현'에서 '군'으로 승격됐다. 한벽루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다 보니 하륜, 정인지, 이황,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묵객들이 자주 찾았다. 이중 하륜은 한벽루 중수기를 남겼다. 조선초기 문신인 하륜(河崙·1347∼1416)은 우리 고장이 아닌, 지금의 경남 진주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벽루 중수기를 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중수기 행간에 그 힌트가 들어 있다. '내가 옛날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조선시대 때 양반가 아녀자가 간통을 하면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랐다.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찍혀 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일부 가문에서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1530년(중종 25)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우리고장 황간현을 다소 부정적으로 적었다. "옛날 현(縣)이 승격되기 전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 이를 전후해 이은(李山+言)이라는 인물이 황간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조선시대 판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황간읍성이 이때 축조됐다. '이은이 전 삼사좌윤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개탄하고 이것을 힘써 없앴기에 호구(戶口)가 날마다 늘고, (…)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 성은 덕에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공이 더욱 빛남이 있도다.'-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倧·후에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그 결과, 광해군은 서인으로 강등돼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됐고,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됐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0여명은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나눠가졌다. '이첨은 한찬남·백대형·정조·윤인·이위경 등과 함께 먼저 형을 받았고, 이원엽·이홍엽·이익엽은 먼저 참형되었으며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고 정몽필 등 여러 총신들과 유희분·유희발 등은 차례로 참형을 받았고, 정인홍·이강·원종·신광업 등은 추후하여 형을 받았다.'- 인용문 중에 유희분(柳希奮)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카가 유효립(柳孝立·1579∼1628)이라는 인물이다. 그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제천으로 유배됐다. 유효립은 그러나 순응보다 모반을 결심했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의 작은아버지 유희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됐다. 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난 광
우리고장 제천 인물인 김식(金湜·1482~1520)은 조선시대 최장거리 도망자로 유명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식은 단지 조광조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야 했다. 처음에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도움으로 형량이 감경, 경북 선산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 신사무옥이 일어나면서 그에게 진짜 절도안치 형이 떨어졌다. 그는 형량이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최운은 거제도로 이배되기 직전 탈출을 감행했다. 고된 행로가 시작됐다. 김식은 경북 선산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부근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김식은 도망자 생활에서 오는 육체·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유숙할 곳이 없어 산골짜기를 경유하여 지리산에 가려고 거창현 수도산 남쪽에 이르렀는데 밥을 먹지 못한 지가 수일이었다. 하루는 고제원(高梯院) 동북편 산기슭에 머물면서 고사리를 캐어다가 먹으려고 우음산을 시켜 마을 집에서 불을 구해 오라고 보낸 후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맸다. 경진년 5월 16일이었다.'- 앞서 김식은 도망자 생활 중에 자기를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조선시대 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왕자 생산 여부에 따라 종4품에서 정1품까지 8등급으로 분류됐다. 가장 높은 등급은 정1품인 빈(嬪)으로 희빈 장씨에게서 그 예를 만날 수 있다. 태종의 정비는 원경왕후 민씨로 4남4녀를 뒀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이방원)이 선수를 쳐 정도전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륙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가 존재했다.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태종도 이 제도를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종의 바람기는 정도 이상으로 심했다.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태종의 바람기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렸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민씨의 불만은 계속 쌓였고, 결국 친정 남동생인 민무질·민무구 형제가 사사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같은 흐름 중에 한 신하가 감히 태종의 바람기를 질타하는 상서를 올렸다. 방문중(房文中)이다. "정비(靜妃)와 명빈(明嬪)이 각각 양전을 설치하여, 빈으로서 적비(嫡妃)와 나란하게 함은 신(臣)의 이해할 수 없는 첫째이요,
기축옥사(1589·선조22)는 학문적으로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기존의 주장을 따를 경우 주인공 정여립은 모반준비 단계에서 도참사상을 교묘히 이용했다. '전날에, "목자(木子=李)는 망(亡)하고 전읍(奠邑=鄭)은 흥(興)한다"는 동요가 떠돌아 다녔는데 여립이 이것을 옥판(玉板)에 새겨서 중 의연(義衍)을 시켜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후, 뒤에 산 구경 갔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몄다.'- 그는 계룡산을 구경하고 어느 폐암(廢庵·중없는 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정감록은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정여립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정씨 성을 가졌다. 다음은 그 문제의 시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客行南國遍) /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鷄岳眼初明) /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躍馬驚鞭勢) / 고개 돌린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니(回龍顧祖形) /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蔥蔥佳氣合) /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瑞雲生) /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戊己開亨運) / 태평 세월을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