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청주읍성 성돌이 탑동 양관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리부재 상태의 청주옥의 석부재도 양관 건축에 사용됐다. '감방(조선시대 전통옥 지칭)은 절반이 거의 무너져가는 온돌로 되어 있어 (…) 이러한 이유로 유치인이나 수인이 집을 부수고 도망이 계속 일어나 도망치면 잡히고 잡혀서는 다시 도망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이와는 별개로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청주읍성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丙辰四月日畢役' 명문이 새겨진 성돌을 수습한 바 있다. 직역하면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이다. 기년상 조선후기 병진년에 해당하는 해는 1736년(영조 12)과 1796년(정조 20)이다. 이와 관련 지역 한 사학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이 일부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개·보수가 이뤄져 1736년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인좌가 청주읍성을 접수할 때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적지 않았다. 무기를 숨겨 상여에 숨겨 몰래 들어왔고, 또 내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
청주시와 민간단체 등이 합심이 돼 청주읍성 성돌을 찾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까지 재작년부터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 남궁병원에서 40개, 서문자리에서 20개, 남주동 개인주택 디딤돌 60여개 등 총 120여여개를 확보내지 확인했다. 본보의 보도에 의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 중 4개 건물에서 주춧돌, 기단석 등으로 대량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양관 자체가 도지정 문화재에서 회수는 사실상 어렵다. 청주성과 관련된 표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685년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 역사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인 셈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라는 표현이 문헌적으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때가 서기 689년이다.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등장한다. 삼국사기 권47 '열기'라는 인물의 열전은 이렇게 쓰여 있다. '구근(仇
택리지 이중환 단양은 도내 지자체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다. 이중환은 얼마나 경치에 반했는지 단양읍내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 주변 명승지를 하나씩 세밀하게 소개했다. 먼저 도담삼봉이다. "물속에서 돌봉우리 세 개가 솟아 있는데 각각 떨어져서 있으면서도 활줄같이 한 줄로 곱게 서있다. (하늘이) 쪼아서 아로새긴 솜씨가 기이하고도 공교로워 마친 인가(人家)에서 쌓은 석가산(石假山)같다. (다만) 우뚝하거나 깎아지른 모습이 없으니 한스럽다." 단양 단성면에는 단양팔경의 하나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삼선암이 위치하고 있다. 삼선암의 아름다운도 마치 수채화를 보듯 표현했다.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시원스레 석간수(石間水)가 귓전을 때린다. "삼선암은 군 서남쪽에 두메에 있다. 산속의 큰 시냇물이 돌로 된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데 시내 바닥과 양쪽 언덕이 모두 돌이다. 시냇물이 흘러내리다가 길게 파인 돌에 이르면 돌유구에 물을 담은 것처럼 되며 둥글게 파인 돌에 이르면 돌가마에 물을 담은 것처럼 된다. 돌과 돌이 서로부딪히며, 밤낮으로 시끄러워서, 물가에서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인암은 대강면 사인암리에 위치한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고려
전회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주 주변을 자세히 둘러봤다. 이중환이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금의 음성읍 일대가 아닌, 가섭산 북쪽의 생극면 팔성리라는 곳이다. 팔성리에는 지금도 지천서원이 존재하고 있고, 서원 안에는 기묘사화 명현의 한 명인 김세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중환이 팔성리 일대를 찾은 것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중환은 이때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곳이 바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 십청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그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대대로 살며, 민가가 수백호인데 모두가 넉넉하게 산다.' 정치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됐던 이중환은 기묘사화때 화를 당한 김세필을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처지를 김세필과 동일시한 심리도 다분히 엿보이고 있다. 김세필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지자 그 부당함을 말하다 귀양갔던 인물이다. 그는 얼마안가 해배됐으나 더이상 중앙정계에 머물지 않고 지천서원이 있는 팔성리 일대로 낙향,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이중환은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을 둘러본 후 그 끝 부분을 '이 지방 사람들은 금천, 가흥, 말마리와 강 북쪽에 있는 내창을 충주의 4대촌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이중환
이중환이 괴산 다음으로 찾은 곳은 조선시대 대읍의 하나였던 충주였다. 지금도 서향에서 충주 중심지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달천을 거쳐야 한다. 이중환은 임진년의 사례를 들며 달천을 매우 호감있게 표현했다.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의 폭포의 물맛과 같다'라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함으로 서울이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 또 과거에 급제한 자가 많기로도 팔도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니 '이름난 고을'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이중환이 충주지역을 호평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충주는 내륙항구라고 표현될 만큼 물길이 발달해 있고, 또 주변에는 넓은 들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이같은 환경을 높이 샀다. 그는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금천' 일대를 이렇게 적었다. '두 강이 마을 앞에서 만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둘러서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한양의 여러 강마을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들이 잇닿아 커다란 도회지를 이루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전회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청주와 그 주변을 둘러봤다고 밝혔다. 기술된 내용상 다음번으로 향한 곳은 생거진천의 땅으로 속칭되는 진천이었다. 이중환 역시 진천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적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청주에 비해 들이 적고 산이 많다. 산골짜기가 겹겹이 감도는 데다 큰 시내도 많다. 그러나 답답한 기상은 없으며 땅도 기름지다.서북쪽으로 대문령을 넘으면 안성·직산 땅이다, 바다와 겨우 100리 떨어져 있음으로 생선과 소금을 편하게 사들일 수 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 중에 소금을 언급한 대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때 청주지역에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를 통해 서해안 소금이 유입됐다. 부강에서 하역된 소금이 육로를 통해 내륙 청주로 들어왔다. 그러나 진천은 같은 서해안 소금이기는 하나 공급 루트가 달랐다. 바로 서쪽의 대문령을 통해 진천 지역에 소금이 유입됐다. 대문령은 지금의 이티(혹은 배티) 고개를 말하고, 그리고 인근 백곡 석현장에도 규모가 큰 소금시장이 닷새마다 열리곤 했다. 진천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표현이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다. 이와 관련, 경기도 용인과 충청도 진천에 살았다는 두 형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전설
전회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지은 택리지를 개괄적으로 알아봤다. 이번부터는 우리고장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택리지를 보면 이중환이 움직인 동선을 대강 알 수 있다. 택리지에 우리고장 고을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최남단인 영동 추풍령이다. 이중환은 추풍령이 소문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음을 크게 강조했다. '(추풍령은) 덕유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정기를 멈춘 곳이다. 이름은 비록 고개라고 하지만 실제는 평지다. 그럼으로 산이 많긴 해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아주 낮거나 평평하지도 않다.' 실제 추풍령의 해발 높이는 221m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승용차로 달리다 보면 '고개를 넘었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영동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 옥천땅에 당도하게 된다. 이중환은 대략 3백년전 옥천땅에 대해 의외로 목화가 잘 된다고 썼다. '들은 너무 메말라 논의 수확은 적고 주민들이 오직 목화심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땅이 목화 가꾸기에 가장 알맞다. 그러나 예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이 나왔으니 학사 남수문과 우재 송시열이 모두 이 고장 사람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옥천군은 현재 옥천읍 삼청리 국도 4호선 폐도변에 '
전회에 택리지 저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19살 때 우리고장 단양 옥순봉을 시로 읊었다고 밝한 바 있다. '땅위의 높은 모양은 단정한 선비가 서있는 듯하고 / 물결 복판에 움직이는 그림자는 늙은 용이 뒤집는 것 같다 / 정신은 빼어나 강산 경치가 뛰어나고 / 기세는 높아서 우주형상을 버티었다. 이중환은 우리고장 충북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충청도와는 유년시절의 인연을 맺고 있다. 택리지 충청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금강에 임하여 사송(四松), 금벽(錦碧), 독락(獨樂) 등 네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 사송은 우리집의 정자이고, 금벽은 조상서(趙尙書)의 산장이며, 독락은 임씨(林氏)의 조상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물이다." 인용문 중 '우리집의 정자가 있었다는 사송'은 지금의 공주시 장군면 일대를 말한다. 택리지에는 총 230개의 자연마을 이름(촌락명)이 나온다. 이중 충청도 지명이 30%로 가장 많고, 또 그중에도 공주 인근의 지명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는 공주 일대가 이중환이 어릴적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세히 기술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학책 '성호사설'을 쓴 이익(李瀷·1681∼1763)이 이중환의 택리지 저술에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읍성 사고에 보관 중이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그 유명한 '고려사'를 쓰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문헌적인 근거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사는 고려시대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가 끝난 후인 고려 때 김부식이 지었다. 마찬가지로 고려사도 고려시대가 종결된 후 기술됐다. 고려사는 조선초 세종대에 집필이 돼 문종 때 발간됐다. 세종실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는데, 여염(일반집)과 섞여 있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종의 실록과 전조의 사적 등, 몇 본을 만들어 각도 명산에 나누어…' 바로 고려사 편찬작업이 진행될 때는 전국적으로 충주사고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고(史庫)인 전주와 성주사고 등은 그 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충주사고에는 고려사를 만드는데 바탕이 된 고려실록 말고도 고려시대 다른 책은 보관돼 있었다. 실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사관 김상직에게 명하여, 충주사고의 서적을 가져다바치게 하였는데 …."- 그중에는 우리들 귀에 익은 책으로 오장육부도, 산해경, 계원필경, 전한서, 후한서, 신당서 등이 보이고 있었다. 충주사고
조선왕조실록은 많이 알려졌으나 고려실록은 다소 생소하다. 그러나 고려실록도 임진왜란 직전까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도 우리고장 충주에 존재했다. 고려 조정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역대왕의 실록을 만들어 처음에는 수도인 개성에만 보관했다. 그러다가 이자겸난 때, 보관해 오던 실록이 소실되자, 이때부터 개성에 한 벌, 그리고 외사고로 불리는 지방에 한 벌씩 나눠서 보관했다. 당시 고려실록의 지방사고가 처음 들어선 곳은 개성에서 먼 남쪽인 가야산 해인사였다. 이 해인사에는 관리인을 별도로 주둔시키지 않고 스님들로 하여금 실록을 자체 보관토록 했다. 그러나 고려실록을 이후 전국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 운반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려실록은 자주 옮긴 것은 왜구의 잦은 출현 때문이었다. 해인사에 보관돼 있던 고려실록은 이후 전국 여러 곳을 전전하던 끝에 우리고장 충주 개천사로 옮겨지게 된다. 이때가 고려 우왕 7년, 그러니까 서기 1381년이 된다. 고려사에는 이런 표현이 보인다. '7월에 왜적이 김해부에 침입하였다. 경상소 안렴사가 보고하기를 "(…) 왜적이 안동 등지를 침공하려 하니, 보주(경북 예천) 보문사에 장서한 역사서적들을 내지
계사년 뱀의 해가 시작됐다. 뱀은 민간신앙의 주대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烏蛇'(오사), 즉 먹구렁이에 대한 기록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가 치계하기를, "청송에 거주하는 민세정(閔世貞)은 그의 형 세경(世卿)이 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니, 67세의 홀어미가 상심한 끝에 또한 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사(烏蛇)를 혹은 찌거나 혹은 회를 쳐서 먹으면 나을 것이다." 하니…'- 구렁이와 관련된 표현으로는 능구렁이도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능구렁이를 한자로는 적동사(赤棟蛇)라고 한다. 등에는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고, 배는 은백색이기 때문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구렁이는 '굵(굵다)'에 호칭어미 '엉이'가 붙은 말로 굴겅이 → 굴헝이 → 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따라서 구렁이는 '굵은 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구렁이는 지금 사람에게는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동작이 느리면서 음흉하거나 능글 맞을 때 '구렁이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해치울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고 하고, 본심을
우리나라에 서양력인 양력이 처음 도입된 해는 1895년(고종 32)이다. 고종은 양력 도입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할 정도였다. 건양은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종이 양력 도입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때문이었다. 주변 나라는 모두 양력을 쓰는데 비해 조선만 유독 음력을 사용하면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음력 표기를 한 후 그 아래에 '양력 몇년 몇월 몇일'을 병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구한말 인물은 권재형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조약문 맨 끝에 '대조선국 개국 501년 5월 29일'이라고 쓰고, 다시 '양력 1892년 6월 23일'이라고 병기했다. 그러나 양력 도입은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종두법을 발견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력 도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한 나라 안에 '정월(正月)'이 두 개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종묘, 사직, 전각에 지내는 제사와 경사스러운 명절, 기원절에 대해 음력을 쓰는 것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정월로 삼기 때문이며, 행정의 조서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