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충주] 충주시가 남한강 명소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대상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고, 이 경우 조선중기 문신인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그의 한시에는 조선 중기의 목계나루 모습이 풍속화를 보듯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어,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부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충주시청 공무원들로 구성된 '수피아들의 행복여행'은 금가면 하담 일대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제2 고향이었던 점을 감안, 일대에 대한 관광 명소화 사업 제안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현재 정약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소가 있던 하담 일대에는 하담진, 두무소, 모현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앞서 본보는 지난 2015년 9월 1일자 '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정약용과 충주 하담' 기사를 통해 관련 내용을 지역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심층 보도한 바 있다. 당시 기사로 인해 열흘 후 다산의 유적이 밀집해 있는 경기도 남양주지역 인사들이 충주 하담을 직접 찾기도 했다. 그러나 충주시가 남한강 관광 명소화 작업을 실감나면서 실증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다산 외에 문신 조석윤이 지은
임진왜란 때 최소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쟁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왜는 이렇게 끌고 간 조선인 포로의 일부를 국제 노예무역에 이용하였다. 당시 왜는 포르투칼로부터는 조총과 담배를 수입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왜는 조총 1자루를 구입하는데 조선인 피로 40명을 지불하였고, 당시 노예시장이 개설된 곳은 태평양전쟁 때 원자탄 피폭을 당하는 나가사키(長崎)였다.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07년(선조 40) 교류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고, 당시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의 조선통신사는 그해 1월 한양도성을 나서 4개월 후에 왜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도쿠가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던 만큼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사로잡혀 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산 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충북일보] 충북에서 가장 오래 된 문집은 조선초기 정추(鄭樞, 1333~1382)의 문집인 《원재집(圓齋集)》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번에 영동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소장 임동철·전 충북대 총장)의 노력으로 《회와시고(晦窩詩稿)》 등 88개 문집의 존재도 새롭게 확인되었다. 호서문화연구소가 최근 이같은 내용이 담긴 《충청북도 지역의 문집해제》(출판사 조율)를 출간했다. 선조들이 남긴 문집은 도내 유교시설과 각 가정에 산재하고 있으나, 하나의 책으로 정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9백80여쪽의 이번 책은 임소장을 비롯해 이두희(한학자), 신범식(영동대 교수), 고수연(〃), 김용남(충북대 강사), 신호철(충북대 명예교수), 정하영(이화여대 명예교수), 정세근(충북대 교수), 이규일(국민대 교수), 이석주(동국대 교수) 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하였다. 10명의 집필진이 지난 2012년부터 4년 동안 관련 자료를 수집한 결과, '충북 연고'의 조선시대 문집은 총 2백52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소장은 충북 연고의 기준에 대해 △충북지역에서 출생·성장한 인물 △사승(師承) 관계와 친·외척으로 일정기간 충북에 거주하였던 자 △충북에 묘소가 있거나 문
[충북일보] 충북 음성지역이 동학 북접군의 남진 출발지이자 마지막 종착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거의 제기되지 않았던 주장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음성지역은 동학의 또 다른 사적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가 얼마전 열린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항일의병 학술대회'에서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성격' 논문을 발표하였다. 북접(北接)은 충청도 등 주로 중부지역에서 활동했던 동학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전봉준이 이끈 납접(南接)에 비해 보다 온건한 입장을 내세웠다. 신 교수는 이 자리에서 『갑오군정실기』, 『양호우선봉일기』 , 『갑오동학란』,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등의 사료를 근거로 "동학 북접군의 출발지는 음성 황산지역이고 공주 우금치전투 후 되돌와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은 음성 되자니 지역"이라고 밝혔다. 『갑오군정실기』과 『양호우선봉일기』는 동학군을 진압한 관군 지휘부의 기록물이고, 『갑오동학란』와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은 각각 권병덕과 임동호가 남긴 글이다. 황산 북접군은 1894년 9월 18일 교주 최시형의 기포령〔봉기령〕에 의해 충청도 뿐만 아니라 인접 경기, 강원도 등에서도 몰려든 동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5년만에 조선과 왜(일본)는 국교를 재개하였다. 열도의 새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쓰시마를 통해 "국교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도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선조 40년(1607) 임진왜란 종전 후 처음으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정사는 여우길(呂祐吉, 1567∼1632),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은 1607년 1월 12일 궁궐에 들어가 하직인사를 올렸고, 그러자 선조는 간단한 술과 함께 말안장, 정남침(定南針 나침반)을 하사하였다.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경섬은 한강의 어느 촌락에서 통신사로서의 첫밤을 맞았고, 이때 선조의 국서를 살펴봤다. "임진년의 변란은, 귀국이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극히 참혹한 화란(禍亂)을 만들고 심지어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우리나라 군신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의리에 귀국과는 한 하늘 밑에 살지 못하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중략) 이제 귀국이 옛일을 혁신하여 위문 편지를 먼저 보내와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하여 성의를 보이니, 참으로 이 말과
[충북일보=음성]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강당말의 5~6기의 집단 무연고 묘는 구전하는 것처럼 '동학난리 의병묘'일까. (사)음성향토사연구회 주관한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항일의병 학술대회'가 '한말 음성지역의 사회경제적 동향과 의병 투쟁'을 주제로 지난 27일 오후 음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는 음성읍 사정리 강당말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5~6기 집단 무연고 묘에 대해 학계의 입장을 처음으로 거론하였다. 강당말의 이 집단 무연고묘는 마을주민들 사이에 동학군 또는 의병의 묘로 구전돼 왔고, 마을지인 『사정향토지 부용』에는 '무명의 동학난리 의병묘'라고 표현돼 있다. 박교수의 이날 발표에 따르면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1907) △『진중일지』1907년 9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4일자 등에 구한말 사정리 전투를 기록한 자료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측 자료인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는 1907년 9월 19일 벌어진 사정리 전투에 대해 "2시간 동안이나 교전한 끝에 그 대부분을 무극장 방향으로 궤주시킴. 적이 남겨둔 시체는 6구이고 우리 측 사상자는 없음. 노획한 총은 5정임"
《병자일기》는 문신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 남평조씨가 쓴 일기로, 병자호란 전후의 농촌 현실과 노비들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병자일기》 속의 남평조씨 생활은 대략 난중피란기(1636년 12월 15일~1637년 2월 17일), 서산·당진체류기(1637년 12월 18일~1638년 1월 25일), 충주 이안 체류기(1638년 1월 26일~5월 28일), 서울 귀환기(1638년 5월 29일 이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안은 지금의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에 해당한다. 이런 《병자일기》는 국문학적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병자일기》는 해서체의 난필에 띄어쓰기가 안 돼 있어 단번에 읽히가 쉽지 않다. 그러나 수정체를 서서히 움직이면 중세 우리말의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김영춘의 논문에 따르면 《병자일기》를 통해 17세기 국어의 단모음화·전설모음화·원순모음화·모음이화·자음동화 등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단모음화는 치음(齒音, ㅅ·ㅈ·ㅊ)의 영향을 받아 ㅑ·ㅕ·ㅠ 등 복모음이 ㅏ·ㅓ·ㅜ 의 단모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남평조씨는 충주 체류기간 쓴 일기에서 지금의 '소'[牛]를 '쇼', '소나기'를 '쇠나기', '
[충북일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자를 크게 뜻글자[표의문자]와 소리글자[표음문자]로 나눠지고 있다. 뜻글자는 그림을 시각화한 것이고, 소리글자는 말 그대로 소리를 문자화한 것이다. 뜻글자는 대표하는 것은 한자(漢字)로, 인류의 지식을 축적·저장·확산하는데 커다란 이바지를 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시대를 맞으면서 한자는 컴퓨터 자판의 첫 번째 문자입력에서 밀려났다. 현존하는 한자는 대략 10만자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10만자를 컴퓨터 자판에 모두 노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려면 한자음을 로마자 발음으로 변환한 '한어병음'(漢語拼音, Chinese Romanization) 버튼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자는 발음이 같은 글자가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로 해당 문자의 성조(聲調)를 확인한 후에야 원하는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 가령 컴퓨터에 한자 '馬'(마)를 입력하려 할 경우 로마자 발음 'ma'를 치면 같은 발음의 麻·罵 문자도 함께 노출된다. 이들 글자군 가운데 '馬'의 성조에 해당는 저요조(低凹調, 제3성)를 선택해야 문자 입력이 끝난다. 나머지
고려 공민왕 10년(1361) 11월 홍건족(紅巾族)이 쳐들어왔다. 홍건족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오랑캐가 아닌 한족이었다. 홍건족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공민왕은 겨우 28명의 신하만 데리고 황급히 개경 도성을 빠져나와 몽진에 올랐다. 국왕의 도피는 피난이 아닌 몽진(蒙塵)으로 표현했다.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궁궐의 편안한 생활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음력 11월은 겨울의 초입에 해당하는 시기로, 어가가 경기도 이천에 당도하자 진눈깨비가 내렸다. 공민왕은 젖은 옷을 모닥불에 말려야 할 정도로 몽진은 비참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가가 이천현(利川縣)에 당도했는데 비에 젖은 왕의 옷이 얼어붙자 장작불을 피워 한기를 막았다.'- 우리 민족의 침략사 가운데 가장 잔혹한 장면의 하나가 이때 벌어졌다. 《고려사》의 기술에 의하면 당시 홍건족의 잔혹한 행동은 야만의 극한에 달했다. '이날 적군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
[충북일보] 내륙인 청주시 오송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유적지에서 이례적으로 제염(製鹽) 토기가 발굴됐다. 특히 이 제염토기는 신석기 이후 바닷가 유적지에서만 간헐적으로 출토됐던 토기여서 학문적인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조상기)은 지난 3월부터 제2 생명과학단지 조성 예정지인 오송읍 봉산리와 정중리 일원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청동기의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기, 원삼국~삼국시대 토광묘, 고려시대 석곽묘, 조선시대 토광묘 등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가운데 정중리 12지점에서 발굴된 U자형의 초기철기시대 토기는 △높이 10㎝ 정도의 크기로 문양이 없고 △포탄을 엎어놓은 U자형이며 △그런 가운데 불이 닿는 밑부분이 유난히 두꺼운 모습을 하고 있는 등 전형적인 제염토기로 파악됐다. 관련 논문에 의하면 소금은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인 가운데 구석기인들은 짐승의 피나 골수, 그리고 파도로 인해 해변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서리소금 등을 통하여 소금을 섭취했다. 신석기 이후에는 정착에 의한 농경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야채 섭취가 급증했다. 그로 인해 소금 섭취량이 더욱 늘어났고 이 과정에서 제염토기가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