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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경섬, 충주 용원과 수회촌에서 묵다

  • 웹출고시간2016.05.31 13:07:59
  • 최종수정2016.05.31 13:07:58

조혁연 객원 대기자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5년만에 조선과 왜(일본)는 국교를 재개하였다. 열도의 새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쓰시마를 통해 "국교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도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선조 40년(1607) 임진왜란 종전 후 처음으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정사는 여우길(呂祐吉, 1567∼1632),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은 1607년 1월 12일 궁궐에 들어가 하직인사를 올렸고, 그러자 선조는 간단한 술과 함께 말안장, 정남침(定南針 나침반)을 하사하였다.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경섬은 한강의 어느 촌락에서 통신사로서의 첫밤을 맞았고, 이때 선조의 국서를 살펴봤다.

"임진년의 변란은, 귀국이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극히 참혹한 화란(禍亂)을 만들고 심지어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우리나라 군신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의리에 귀국과는 한 하늘 밑에 살지 못하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중략) 이제 귀국이 옛일을 혁신하여 위문 편지를 먼저 보내와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하여 성의를 보이니,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어찌 두 나라 생령(生靈)의 복이 아니겠습니까.(중략) 변변찮은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어 놓았습니다. 모두 잘 살펴주기 바랍니다."-<해사록 1607년 1월 12일>

경성의 조선통신사는 동래로[영남대로]를 따라 남진을 계속, 나흘만에 우리고장 충청도 지역인 용안역(지금의 충주시 신니면)에 당도하였다. 당시 여정은 국무(國務)를 수행함에도 점심을 굶어야 하는 등 고생의 연속이었다. 임진왜란 직후의 처참한 생활상 외교사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기곤이 뼈에 사무쳤다"라고 기록하였다.

경섬은 용안역(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용원)에서 1박을 하였다. <대동여지도> 부분.

"말을 달려 용안역(用安驛)에 당도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연원찰방 기경중(奇敬中)이 사람과 말을 거느리고 왔다. 지대관은 진천현감 윤인연(尹仁演), 청안현감 양사행(梁士行)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나흘 동안의 길을 모두 점심을 먹지 않고 연일 역참을 지나는데, 기곤(飢困)이 뼈에 사무쳐 괴로웠다."-<해사록 1607년 1월 16일>

경섬은 동래로를 따라 남진을 계속, 하루 뒤에 거읍(巨邑) 충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겨울비가 계속 내리자 충주에서 1박을 더한 뒤 19일 지금의 수안보면 수회리에 도착하였다. 당시 충주목사는 단양이 본관인 우복룡(禹伏龍), 그리고 청주목사는 《동국지리지》의 저자로 유명한 한백겸(韓伯謙)이었다.

《해사록》의 전날 기록을 보면 우복룡과 한백겸은 충주목 관아에서 경섬 등 통신사 지도부를 위한 연향을 베풀었다. 그날밤 충주목에서 수회리에 유숙한 경섬에게 가기(歌妓) 두 명을 보냈다.

"아침에 예천 홍치상(洪致祥)이 술과 과일을 가지고 와서 잠깐 술을 나누었고, 이어 충주 목사ㆍ청주 목사 및 윤 동래(尹東萊)와 더불어 술을 들고 헤어졌다. 신시에 출발하여 수회촌(水回村)에서 투숙하는데, 상사와 한 방에서 같이 묵었다. 촌집이 좁고 누추하여 침식이 꽤 괴로웠는데 목백이 뒤에 가기(歌妓) 두 사람을 보내어 객회를 위로해 주었다."-<해사록 1607년 1월 19일>

경섬은 다음날 수회촌을 떠나 조령[새재]-용추-문경의 여로를 따라 계속 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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