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구름조금충주 17.0℃
  • 맑음서산 18.6℃
  • 맑음청주 18.1℃
  • 맑음대전 18.5℃
  • 구름조금추풍령 19.0℃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홍성(예) 18.0℃
  • 맑음제주 21.3℃
  • 맑음고산 18.8℃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제천 17.2℃
  • 구름조금보은 17.3℃
  • 구름조금천안 17.8℃
  • 맑음보령 18.9℃
  • 맑음부여 18.7℃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6.06.14 15:41:17
  • 최종수정2016.06.14 15:41:17

조혁연 객원 대기자

임진왜란 때 최소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쟁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왜는 이렇게 끌고 간 조선인 포로의 일부를 국제 노예무역에 이용하였다. 당시 왜는 포르투칼로부터는 조총과 담배를 수입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왜는 조총 1자루를 구입하는데 조선인 피로 40명을 지불하였고, 당시 노예시장이 개설된 곳은 태평양전쟁 때 원자탄 피폭을 당하는 나가사키(長崎)였다.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07년(선조 40) 교류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고, 당시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의 조선통신사는 그해 1월 한양도성을 나서 4개월 후에 왜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도쿠가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던 만큼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경섬의 <해사록>이 수록돼 있는 《해징총재》.

"사로잡혀 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산 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그들이 귀국할 생각이 없으면 각각 생각대로 해 주고, 고향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속히 돌아갈 준비를 해주라는 것이 국왕의 엄명(嚴命)입니다."-<해사록 1607년 6월 20일>

윤6월 중순, 경섬의 조선통신사 일행은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소문을 듣고 조선통신사 배가 지나는 해변으로 달려와 "고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외치는 조선인 포로들이 속출하였다.

"오시(午時)에 작은 배를 타고 점포(店浦)를 지나는데, 어떤 남자 하나가 포구의 갈대밭 속에서 달려나와 부르짖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오. 돌아가는 배에 태워 주시오"하므로 배를 멈추어 태워 주었다. 그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 주인이 놓아 보내려 하지 않으므로 도망쳐 와 여기 숨어서 행차를 기다렸다 하니, 그 정상이 가련하다."-<해사록 1607년 윤6월 11일>

함께 귀국하는 조선인 포로들 중에는 아예 자비로 배를 구입해 통신사의 배를 뒤따며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상도 울산(蔚山) 등지의 사람 40여 명이 저들대로 배 한 척을 사서 미곡을 가득 싣고 술을 동이에 가득 채워, 돛을 달고 돛대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며 따라왔다."-<〃>

쓰시마 섬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일기도(一岐島)라는 비교적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서 조선통신사의 격군, 즉 노젓는 사람과 그 어미가 16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했다.

"격군 수복(守福)의 어미가, 임진년 난리 때에 포로가 되어 간 곳을 모른 지 지금 16년인데, 그의 어미가 마침 이 섬에 있었다. 우연히 상봉하여, 모자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들을 같이 배에 태워서 돌아왔다."-<해사록 1607년 윤6월 22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때 포로부대를 운영했고, 따라서 우리고장에서도 피로인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 가운데 안필득(安必得)이라는 인물이 경섬의 조선통신사와 함께 귀국했다.

"저녁에 충주에 도착하니, 신임 목사 홍사효(洪思斅)가 아직 부임하지 않아서 단양군수 안희(安熹)가 겸관(兼官)의 임무를 띠고 왔다. 그 아들 안필득(安必得)을 쇄환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해사록 1607년 7월 13일>

/ 조혁연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매거진 in 충북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세종충북지회장 인터뷰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